[스크랩] 라산스카/ 김종삼
라산스카/ 김종삼
바로크 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
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
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
- 시집『북치는 소년』(민음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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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은 현역이 아닌 1984년 63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옛 시인이다. 그는 이 시를 포함해 ‘라산스카’라는 제목의 시를 세 편이나 남겼는데도, 과문한 독자들로서는 알 턱이 없는 ‘라산스카’에 대해 아무런 정보나 보충설명을 남기지 않았던 불친절한 시인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어느 지명인지, 러시아 출신 무용수 이름인지, 음악가인지 이 시만으로는 단서를 잡을 수 없다. 독자 입장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대개의 독자들은 뭔지 모르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간결하면서도 신비한 그의 시세계에 하염없이 빨려든다.
김종삼의 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명 지명 등 많은 외래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아직까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것도 있다. 시선집 ‘북치는 소년’에는 수많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고유명사가 와글거린다. 그것들은 대개 음악가들이나 화가들의 이름이다. ‘라산스카’는 뉴욕출신의 소프라노 가수이고, ‘팔레스트리나’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로 그나마 파악이 용이한 편에 속한다. 그의 생전 육성이 전하고 있다. “라산스카가 뭐냐고? 밑천을 왜 드러내? 그걸로 또 장사할 건데. 묻는 사람이 여럿 있어요. 안 가르쳐 줘요.”
김종삼의 서구 취향은 그의 시가 대체로 5~60년대에 쓰진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칫 거북하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박인환에 비해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것은 박인환의 경우처럼 겉멋이나 교양 현학에 머물지 않고 정서적 확장을 통해 어떤 상징에 이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김종삼은 그것들을 내면으로 최대한 끌어들이고 밀착시켜 자기화했다. 그가 음악과 관련된 일을 했다는 사실로 그의 음악적 조예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음악가들이 자주 등장하고 음악은 김종삼 시세계의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음악적이기 보다는 회화에 가깝다. 담백한 여운으로 남는 시가 에트랑제의 모습을 한 파이프 담배와 벙거지 모자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보헤미안 시인의 풍모와 어우러져 있다. 뿌리 내리지 못한 그 영혼의 잔상이 내 안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라산스카가 뭔지 모르고, 팔레스트리나를 들어본 적이 없어도 시를 읽으며 자욱한 비통에 젖는다.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 내 가슴으로도 전이되어 가슴 저리다. 오늘은 조금 슬프고, 조금 허무하고, 조금 쓸쓸해져도 좋을 듯하다. 그래야 평화가 찾아올 것 같다. 나를 구원해다오, 라산스카! 그리운 안니 로리.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