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 —〈그릇-그릇 1〉 전문
제가 깨져서 칼이 된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가
1970년대, 80년대에 철저하게 깨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오세영이가 있겠습니까. 그 시대에 부화뇌동했으면 문학적으로 지금 살아남아 있지를
못했겠지요. 오세영은 오세영이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긍심을 지켜야 시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으나 특히
개성과 창조정신을 본질로 한 문학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한국문단에 시인이 만 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만 명의 시인을 모두 알고 있습니까? 제가
아는 시인이라고는 그중 50명도 채 되지 못합니다. 생각해볼 문제이지요.
〈라일락 그늘에 앉아〉를 읽어보겠습니다.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라일락 그늘에 앉아〉 전문
마지막 그 한 줄의 내용이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눈물이 나서 마지막 한 줄은 읽어보질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사랑이란 정작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야 더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요. 저도 연시들을 꽤 많이 썼습니다. 강연을
시작할 때 김윤 시인이 제 시 〈원시〉를 읽었는데요, 〈라일락 그늘에 앉아서〉도 그런 계열의 시 한 편입니다.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데서나/ 쉬어야겠다./
동백꽃 없어도 좋으리,/ 해당화 없어도 좋으리,/ 흐린 수평선 너머 아득한 봄 하늘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나와/ 그리움 풀어야겠다./ 갈매기 없어도 좋으리./ 동박새 없어도 좋으리./ 은빛 가물거리는 파도 너머 지는 노을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가까운 포구가 아니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먼 하늘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전문
한때 좋아했던 여자를 위해서 쓴 시입니다.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 한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소월을
강의하며〉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고려연방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통일은 우선/ 교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한 학생이 불쑥 일어나/ 나더러 반통일 세력이라고 한다./ 부동산투기를 근절하기
위해서 만일/ 국가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다면/ 나의 유일한 부동산인 집 한 채를/ 기꺼이 헌납할 생각이 있는 나인데/ 통일을 위해서라면
대학교수직도/ 기꺼이 물러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인데/ 25년 교직 경력, 150만 원 월수는/ 이제 가진 자가 되었구나./ 그렇다. 나는/
가진 자이다./ 집에 가면 나의 사랑하는 강아지 「왈패」가 있고/ 브람스의 음악이 있고/ 그보다는 아직 티브이의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찔찔/ 흘릴
눈물이 있다./학생들이 떠난/ 빈 강의실,/ 홀로 남아 분필을 추스린다./ 소월(素月)의 허무주의처럼 흑판은/ 텅 비어 있는데/ 가만히 새겨
보는 그대 이름, 아니/ 산산이 부서진 나의 이름. —〈소월(素月)을
강의하며〉 전문
이런 시도 쓴 적이 있습니다. 물론
1980년대에 소위 ‘분단시’라고 명명된 그런 시 예컨대 〈김치〉나 〈10월 어느 날〉 같은 시도 있습니다. 한국분단시 사화집 같은 데 꼭
실리는 작품입니다. 저들은 저를 나쁜 의미로 순수시인이라고들 합니다만 사실 저는 민중시도 여러 편을 썼지요. 우리 문단에서는 민중시 집단에
들어가 조직의 일원으로 인맥을 형성하지 않으면 그 시인이 아무리 민중다운 민중시를 써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바로 그 불문율에 걸려 있었던 셈이지요.
제가 봉직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는 대학에서는 오로지 학문만을
해야지 문학창작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학풍이 하나의 전통으로 지켜져 온 학과입니다. 그것은 제가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나 지금이나
움직일 수 없는 절대 명제입니다. 그래서 한 학년의 재적 25명 안팎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학생들은 시나 소설 같은 것을 창작하거나 기타의 문학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령 창작을 염두에 두고 입학한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재학 중 대부분 국어학이나 고전문학 아니면 비평과
같은 문예학자로 그 노선을 바꾸지요. 물론 이제나 저제나 서울대학교에서는 시창작 혹은 소설창작과 같은 문학창작 강의도 없습니다.
제 학창 시절의 원로 선생님들께서는 서울대는 시나 소설을
쓰는 곳이 아니니 정말로 창작을 하고 싶다면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동국대학교나 서라벌예술대학교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저도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시를 쓴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시를 창작한다는 죄 때문에 학과에서는 마치 비 맞은 장닭처럼 숨어다니곤 했습니다. 시
쓴다는 소문이 나면 처음엔 선배들이 불러서 타이르고, 다음엔 조교가 또 데려다 혼내고, 교수께서 아시게 되면 당장 자네는 서라벌예술대학이나
동국대학을 가라는 호통을 맞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전통이 서울대 국문학과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교수로서 서울대학교에서 시 쓴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만일 제가 시를 쓴다고 하면 교수들 사이에서 학자가 아니라
‘시 나부랭이나 쓰는 사람’으로 지탄받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동료로부터 실제로 그런 말을 듣기도 했고요. 서울대학교수로
인정을 받는데 적어도 국문학과에서만큼은 시창작이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아니 그로 인해 학자로서의 이미지는 오히려 크게 손상이
되지요. 비록 제가 학술 서적을 20권 가까이 발간했지만요. 그것은 문단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세영이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나 하는 사람이지
지가 무슨 시인이냐 하지 않습니까. 비록 시집을 17권이나 발간했지만요. 제가 시인입니까, 아닙니까? 양자의 한쪽에서는 저 사람은 학자니까
시인이 아니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저 사람은 시인이니까 학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저는 실로 아무것도 아닌 셈이지요. 저는 지금까지 사실 그런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의 정체성은 항상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학생들에게 시창작 강의를 해보고도 싶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는 시창작 강의가 있을 수 없는 까닭에 그것은 물론 다른 사립대학에의 출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요. 사립대의 문학창작과에 가면 비록 수능시험의 성적 저조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문학의 천재성이 숨어 있는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심의 그런 소망을 알았던지 어떤 사립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던 후배 시인 한
분이 제게 출강을 요청해요. 학생들에게 시창작 지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슴을 설레며 그 학교 문예창작과의 시창작 연습이라는
강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시창작 강의에 무슨 묘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작품을 써오게 해서 발표시키고 토론하면서 제가 나름대로 문학 이론을 곁들여 정리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 학생이 시라는 것을
써와서 읽는데 도저히 시라고 할 수 없는 글이었어요. 남북이 빨리 통일을 해서 하나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그 내용조차 선전선동의 구호였습니다.
그 당시 문단에서 유행하던 소위 ‘분단시’라는 것을 써서 온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평했습니다. 통일도 좋고 분단도 극복되어야 하겠지만
우선 문학은 문학으로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시의 내용을 보면 당장 통일하자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인적 물적 교류를 트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 서서히 점진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학생이 불쑥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교수님은
반통일 세력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통일세력은 당장 통일을 원한다는 겁니다. 이젠 다 잊고 있을지 모르나-또는 시대가 그랬으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 혹은 변명을 할지 모르나- 그 당시 운동권과 소위 민중시인들은 한결같이 모두 이런 주장들을 했지요. 이에 무슨 토를 달면
그것은 당장 반통일 세력으로 몰리거나 어용으로 지탄을 받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학생에게 내가 왜 반통일 세력이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서슴지 않고 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가진 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통일이 되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말하는 통일이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었겠지요.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수라는 것은 가진 자(지금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당시 서울대학교 정교수라는
직책의 샐러리맨의 월급은 실은 대 기업 과장 수준도 채 되지 못한다)의 계급이다. 그런데 민중이 원하는 통일은 북한에 의한 남한 흡수통일이고
바로 지금이 그러한 시점이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을 접수하게 되면 오세영 같은 서울대학교 교수는 그 직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이유로
오세영 같은 가진 자는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 즉 반통일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 또한 모두 다 잊고 있거나 그때는 모두가 그랬지
나만 그랬냐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 정치가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 민중 운동권들의
보편적 생각이자 공개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짐짓 그 뜻을 모른 체하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 무슨 말인가. 남북이 통일되면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걸세. 자네가 의미하는 바 ‘가진 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가령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는 지금 한반도의 남쪽만을 가지고도 이렇게 큰 부를 축적하고 있는데 만일 남북이 통일되면 그 두
배의 부를 축적할 것 아닌가. 노태우 대통령 역시 지금은 한반도의 반쪽만을 통치하고 있지만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대통령이 될 터인즉
그들이 왜 통일을 반대하겠는가.”라고요.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이 대학에서 문학창작 지도라는 것은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싸들고 그만 집으로 돌아와서 학기 중임에도 다시는 그 대학에 출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기대했던
환상이 깨져 버린 허탈감 때문이기도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 출강을 도와주었던 그 후배 교수에게 매우 미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런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거의 7, 8년 후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사의 부탁으로 몇 달 칼럼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원고를 넘기는 날 마침 원고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담당기자와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의 인상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습니다. 그의 태도 역시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났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 선생님 그때 저희 학교에 출강하셔서 시창작 지도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그 문제
학생이 저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이좋게 앉아 그때 그 이야기를 새삼 꺼내며 담소를 나누었지요. 그의 변명 역시 똑같았습니다.
“그때는 모두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 기자는 지금 문단에 등단하여 상당히 주목을 받는 시인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산다는 것은〉을 읽어 보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 기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날려야 될 그 한 때를 기다려/ 안으로 소중히 품어 안은/ 새,// 산다는 것은/ 먼 박명의 하늘을 날아/ 암흑을 건너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둘수록 더 찬란하게 예비된/ 그의 비상.// 이른 봄,/ 목련 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병아리 떼가/ 꽃망울 터지는 순간을 노려 나래
치듯// 반짝,/ 성냥불처럼 밝히는 생의 불꽃 속에서/ 육신을 벗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를 내 오늘/ 문득 본다.
—〈산다는 것은〉 전문
곧 목련꽃이 피겠네요. 여러분, 목련꽃 필 때 꽃봉오리 보셨어요? 마른 꽃가지에서 막 벌어지는
꽃봉오리를 보면 마치 병아리 같지 않습니까? 나는 병아리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목련꽃 봉오리가 활짝 꽃을
피워서 마침내 하늘에 꽃잎들을 날리는 것은 새가 하늘로 비상하는 것에 해당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또한 이렇게도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가슴에 새 한 마리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고요. 인생의 종말에 사람들은 그 가슴에 키우던 그 절실한 새 한 마리를 마침내 어딘가
푸른 하늘로 날려보내겠지요. 어떻든 이런 발상으로 쓰인 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우연히 인터넷을 쳐보니까 이 시가 어느
블로그에 올려 있어요. 그래 호기심이 나서 읽어봤더니 “산다는 것은 가슴에 개 한 마리 기르는 일일지도 모른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웃음) 나는 불쾌하면서도 내심 웃기는 마음이 있어 대체 이게 왜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생각해 봤지요. 여러분 워드 문자판에 ‘ㄱ’과 ‘ㅅ’이
바로 붙어 있는 것 아시지요? 그러니까 이분이 워드를 치면서 ‘ㅅ’을 칠 것을 바로 옆에 있는 ‘ㄱ’으로 오타를 친 것이지요.
인터넷에 올려진 제 작품들 가운데는 또 이런 것도 있어요
〈봄〉이라는 시인데요. “봄은 피곤에 지친 청춘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라는 구절을 누군가가 “봄은 피곤에 지친 춘향이가 낮잠 든 사이에
온다”라고 해놓지 않았습니까.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도 많아졌지만 또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인터넷에 제 이름과 같은 다른 오세영-그러니까 동명이인-이 올린 작품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나의 관점에서는 가짜 오세영이지요.
엊그제는 인터넷 블로그에 또 오세영이라는 목사님의 시가
올라와 있어 정중하게 편지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은 퍽 합리적인 분 같아 앞으로는 제 이름과 혼동이 되지 않는 방식-예컨대 오세영이라는 이름
앞에 당신의 호나 목사라는 호칭 같은 것을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올리겠다 하셔서 일단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두세 분의 또 다른
오세영이 있어요.(웃음)
그것을 불러 보석이라 이름한다./
햇빛에/ 눈부신 그 반짝거림,/ 강변 모래 언덕에/ 사금파리 하나 반쯤 묻혀 있다./ 보석이란 가장 소중한 마음을 이르는 것이려니/ 우리 어린
날/ 네게 바친 이 순수한 영혼의 징표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깨진 것은 모두 보석이 된다./ 한때 값진
도자기였을지라도,/ 한때 투박한 사발이었을지라도,/ 그것은 한낱/ 장에 갇힌 그릇일 뿐./ 깨지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까닭에/ 보석이
된다./ 그 봄날의 풀꽃 반지도/ 그 강변의 모래성도/ 지금은 모두 강물에 씻겨갔지만/ 우리들의 강 언덕엔/ 눈부신 보석 하나/ 푸른 하늘을
지키고 있다./ 영원처럼······ —〈보석 2〉 전문
지금은 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도 많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가지고 놀 장난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금파리 같은 것을 주어서 갈고 닦아 마치 보석처럼 간직하고 그런 것들을 갖고 놀았지요.
사금파리가 뭡니까. 깨진 그릇이지요. 그런데 모든 그릇들은 본질적으로 항상 구속되어 있습니다. 식기로 사용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장에 갇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깨진 사금파리만큼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매여 있거나 구속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것들은
끝없는 자유. 완전한 자유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무엇이나 깨지지 않고서는 절대의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시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지지 않고서 완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생도 언젠가는 한 번 깨져야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바람이라 이름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呼名)해도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이제 바람이라 불러본다./ 바람이여,/ 내 귀를 멀게 했던 그 가녀린 음성,/ 격정의
회오리로 몰아쳐와 내 가슴을 울게 했던 그/ 젖은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산들바람에, 때로는 돌개바람에, 아니/ 때로는 거친
폭풍에 실려/ 아득히 지평선을 타고 넘던 너의 적막한 뒷모습 그리고/ 애잔한 범종(梵鐘)소리, 낙엽소리, 내 귀를 난타하던 피아노 건반/ 그
광상곡(狂想曲)의 긴 여운./ 어느 먼 변경 척박한 들녘에 뿌리내려/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 아니면 씀바퀴 꽃으로 피어났는가./ 말해다오./
강물이라 이름한다./ 이미 잊혀진 것들,/ 그래서 무엇이라 아예 호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제 강물이라 불러본다./ 강물이여,/ 한때
내 눈을 멀게 했던 네 뜨거운 시선,/ 열망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내 육신을 황홀하게 달구던 그 눈빛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때로는 여울에,
때로는 급류에, 아니 때로는/ 도도히 밀려가는 홍수에 실려/ 아득히 수평선을 가물가물 넘어가던 너의/ 쓸쓸한 이마. 그리고/ 어디선가 꽃잎이
지는 소리, 파도소리, 철썩이는 잔 물결의 여운./ 어느 먼 외방의 썰렁한 갯벌에 떠밀려/ 뭍을 향해 언제나 귀를 쫑긋 열고 살아야만 하는가./
해파리, 민조개, 백합 아니/ 온종일 휘파람으로 울다 지친 소라/ 말해다오./ 구름이라 이름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해도 다시 이룰 수 없는 형상들을 향해 나는/ 이제 구름이라 불러본다./ 구름이여,/ 한때 내 맑은 영혼의 하늘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던/
오색 빛 채운(彩雲)/ 그 빛나던 무지개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별빛에 실려, 달빛, 아니 어스름한 어느 저녁 답,/ 스러지는 한 조각
노을에 실려/ 아득히 먼 허공으로 희부옇게 사라지던 너의 그/ 두 빈 어깨 그리고/ 어디선가 내리치는 마른번개, 스산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잔기침 소리/ 어느 먼 이역의 하늘로 불려가/ 흩뿌리는 싸락눈, 진눈깨비 아니/ 동토(凍土)에 떨어져 나뒹구는 우박이 되었는가./ 말해다오./
너를 찾는다.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강물이라는,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해 저무는 가을 저녁/ 찰랑대는 강가의 시든 풀밭에 홀로/
망연히 앉아. —〈너를 찾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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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세영 시인과의 꿈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진솔했고, 담백했고,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예술가적 자긍심이 빛났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햇빛에 어둠이 더해지는 음예(陰翳)의 공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깊어 보였다. 아쉽지만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간. 유심의 홍사성 주간은 “선생님 아직은 쓸쓸한 이마는 아니십니다”로 다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렇다, 그는 진정 푸른 이마의 시인이신데 쓸쓸하다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누구나 저 지옥 같은 예술의 시간 속에서는 쓸쓸한 이마가 될 수 있는 것이리라. (사진삽입-청중1이나 청중2 중 좋은
것으로 넣어주세요)
그리고 한 시인의 질문이 있었다. 엉뚱하고 생뚱맞지만 재밌는
질문이었다. “공연문화를 즐기는 오세영 선생님은 공연장에 공짜로 가시느냐, 티켓을 사서 가시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더러는 장사익 씨 같은 분이
보내준 초대장이나 문화관광부나 국립극장, 주한 대사관과 같은 관련기관 혹은 단체의 초청에 의해서 가기도 하고, 그러나 아주 좋아하는 가수들
예컨대 조수미나 패티김 같은 분들의 연주회에는 쌈짓돈을 헐기도 하신다는데. 그리고 또 무슨 질문이더라, 사모님에 대한 질문도 오고 갔던 것
같다.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내는 곱지만 아름답지는 않다는 말씀에 좌중이 살짝 술렁이기도 했었는데.
이들은 재빨리 ‘곱다와 아름답다’의 사이를 널뛰면서 시를
찾아보려 애쓰는 모습들이었다. 여긴 시의 나라. 시인의 어법이 통했던 거다.
뒤이어 뒤풀이가 이어지고 맛있는 김밥과 소주와 과일과 안주로
풍성한 잔칫상이 벌어졌다. 모두 먹고 마시면서 잠시 출렁, 흔들려 보심이 어떠실지? 그러나 선생은 자세를 한 번도 무너뜨리지 않았다. 새까만
후배 앞에서도 늘 그 모습으로, 밥을 권하고 술을 권하고 과일을 챙겨 주셨다. 그리고 나 혼자서 몰래 엿본 선생의 왼 볼은 팽팽해서 수줍기도
했는데. 맞다, 먼 눈빛! 그에게는 소실점 밖을 바라보는 먼 눈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늘, 여기까지 왔으리라. 모두 선생을
사랑했고, 한마음으로 선생을 존경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 오세영이라는 시인을 한 보따리 선물로 받고 가슴 벅찼으리라. 깨져야 완성을 본다는 시인의 거침없는 시론을 노트에, 가슴에 머리에,
간직한 우리는 오늘의 큰 시인 곁에서 곁 바람을 쐬며 약간은 흐트러져서, 그러나 마음껏, 행복했다.
-정리/ 손현숙(시인)
* 출처: 유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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