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진호 동쪽 4일낮 5일밤의 비록. ♬ Es war doch alles nur ein Traum(그저 스쳐지나가는 꿈이었던가)-Monika Martin
♬ Es war doch alles nur ein Traum(그저 스쳐지나가는 꿈이었던가)-Monika Martin
6.25 정전협정 60주년 기념 출간으로
허빈(許斌) 작가가 로이 E.애플맨의 장진호 동쪽(East of Chosin,1989년)의 변역을 탈고(脫稿)하고
장진호 동쪽 4일낮 5일밤의 비록.을 출간 기념으로 1권을 보내왔다.
끊임없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는 허빈작가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장진호 동쪽 4일낮 5일밤의 비록: 저작-로이 E.애플맨. 번역-허빈.
이 책은 17일의 장진호전투 중에서 4일낮 5일밤의 전투 장진호 동쪽 전투에 대한 기록이다.
1950년 겨울, 함경남도 개마고원에 위치한 얼어붙은 한 저수지 부근에서 죽어간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카투사(KATUSA)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50.8.16일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부산항에서 요코하마로 떠난 이래로 8월 24일까지 8623명의
카투사가당시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이던 미 7사단에 긴급하게 보충되였다.
그 후 약 43,000명의 카투사가 참전하여 9,000여명이 전사했다.
62년 만에 돌아온 용사들의 유해는 바로 미 7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소속 되었드든
약 800명의 카투사 중 일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6.25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 훈련받은 카투사의 일원이였기에 더욱 감회가 남다르다.
또한 장진호 동쪽((East of Chosin,1987)은 장진호 전투의 많은 번역물 속에 여태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사살이다.
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
62년만의 귀환.
한국군 최초의 카투사 800여명의 죽음이 장진호 동쪽!!!
잔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이갑수 일병과 김용수 일병 등 12구가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이들 전사자 유해는 6.25전쟁 당시 국군으로 입대해 미군에 배속됐던 카투사들이다
-2012.5.25일 조선일보
1950년 장진호전투에서 숨져 현장에 묻혔던 페이스 중령의 유해를 2004년 북한에서 찾이
8년간의 감식 끝에 신원을 확인 했다. -2013.4.1일 중앙일보.
이 책을 읽고서야 미국 할리우드에서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벌인 사투(死鬪)를 소재로 한 영화“혹한의 17일”이 할리우드에서 제작 중에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영화제작소도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한 대작 “블록버스터”여화를 만들겠다고 선언.
1950.6.25.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
16개국의 다국적군이 UN의 깃발 아래 신속히 참전한 일은 다행스럽고 기적같은 일이였다.
1950~1953년간 이때
국군-62만여명(전사13만여명.부상45만여명.실종2만여명.포로8천여명)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희생
외국의 젊은이15만여명.
그중에서도 미군야 13만여명(전사3만여명.부상9만여명.실종3천여명.포로4천여명)이 희생하였다.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9년간(1964~1973) 1만여명(전사5천여명.부상1만여명.)과 비교하면
미군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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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2주간 개마고원 근처 장진호에서
7개사단 규모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위해 벌인 전투입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10배를 훨씬 넘는 중공군 대 병력의 남하(南下)를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遲延)시켰으며,
중공군의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黃草嶺) 장진호 입구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과 함주군 하기천면 사이에 있는 고개 1,210m)을 차단 포위한 중공군도 격멸,
와해시키고 죽음의 함정(陷穽)을 탈출하였고, 흥남에 도착, 흥남 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2월 9일에는 사령부로 부터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2월 10일 6시 선두부대가 함흥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11일 저녁까지 후위 부대 전부가
함흥으로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14일 부터 24일까지 전설적인 해상 퇴각이 벌어지는데 무려 민간인
10만과 UN군 12만이 겨우 백수십척의 배로 탈출하는 전설의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젔다.
흥남에서 1만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항해한 빅토리아호는 전세계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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