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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장정일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2. 6. 07:43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시집『길안에서의 택시잡기』(민음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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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은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의 종교였던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든 탓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였다. 어린 시절의 꿈은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여 다섯 시면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라 했다. 그의 책 읽기는 그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아버지로부터의 탈출구인 동시에 교련을 거부하면서 진학을 포기한 그에게는 독자적인 학업이었다. 삼중당문고를 교과서 삼아 열심히 외국소설 등을 독파했다. 19세 때엔 폭력사건으로 소년원에서 보내져 1년 6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그곳에서 많은 양의 다양한 책들을 읽어댔다.

 

 오랜 정신적 방황을 겪은 그는 시를 배우기 시작했고, 23세 때 한 무크지를 통해 시를 발표한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해왔다. 그 결과 26세 때인 1987년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연이어 시집『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발표하면서 지금껏 문단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던 '장정일'이라는 '불온한 문학'은 중앙문단을 긴장케 했다. 같은 해 소설가를 겸업하면서 확실히 '장정일 코드'가 자리 잡았다. 소설《내게 거짓말을 해봐》는《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음란성시비로 출간되자마자 출판사측에서 자진 수거하고 결국 그는 구속·수감되어 커다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사랑’을 풍자한 독자적 문학 행위인 동시에 전혀 새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패러디는 어떤 작품을 모방해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으로, 비판적 의도로 쓰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춘수의 꽃이 관념적 존재라면 장정일의 '라디오'는 가시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시대엔 라디오 단추가 아니라 '리모콘'으로 바꿔 이해해도 되겠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꽃의 의미가 살아나는 건 아니고, 단추를 꾹 눌러주어야 비로소 사랑이 작동된다. 더 이상 사랑은 온건한 정서적 행위가 아니라 건조하긴 해도 버턴을 누르고 전파가 오가야 그 꽃이 피어나는 구체적 행위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랑의 편의와 실용을 조롱하고 비판하는듯하지만 결국 이 전파는 나와 그 누군가를 이어주는 존재이면서 사랑의 감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김춘수의 꽃에서 보여주는 전통적 사랑이 진지하고 묵직하게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노래했다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가볍고 감각적인 어투로 사랑의 세태를 풍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시의 뒤에 숨은 다른 의미가 있다면, 과연 사랑을 편하고 가볍게만 받아들이고 일회용품처럼 소비되는 현대 산업 사회에 대한 교과서적 비판뿐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무겁게 남는다. 그런데 한때 TV에서도 가끔 볼 수 있었던 그가 요즘은 통 뵈지 않는다. 그의 근황이 궁금하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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