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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화이트 크리스마스/ 나태주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2. 24. 07:01

 

 

 

화이트 크리스마스/ 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시집『슬픔에 손목 잡혀』(시와시학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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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탄생을 기뻐하고 그 사랑을 널리 전파할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지는 날이 크리스마스이다. 우리 슬픈, 그러나 무작정 환희였던 젊은 날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실로 굉장했다. 명동으로 동성로로 광복동으로 쏟아져 나온 인파와 여기저기서 질러대는 괴성들, 그리고 그날은 초단대목이라 술집과 여관과 택시는 모두 ‘따블’이거나 ‘따따블’이었다. 연중 크리스마스와 송년의 날만 통금이 풀려 자정 이후에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던 그때의 크리스마스는 그야말로 모두 해방을 맞은 민족들이었고 눈까지 와준다면 눈물을 질금질금 아니 흘리고는 배길 수 없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화이트크리스마스의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눈이 오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공연히 사람들의 심사를 자극하여 왠지 모를 설렘을 갖게 한다.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특별한 밤이길 소망한다. 홀로 지내면서 견딜 수 있는 날이 아니다. 80년대 말 월드스타 강수연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최고의 주가를 올릴 무렵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강수연은 큰 아파트의 고층 베란다 창을 모두 열어 재낀 채 모자 푹 눌러쓰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온 과자 부스러기를 안주로 혼자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고 한다. 당시 천하의 강수연이었으니 특별한 스케줄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한 지인들이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던 결과였다.

 

 이제 누구로부터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는 제의를 받거나, 그랬으면 하고 은근히 반짝이는 눈치를 보내는 사람은 없다. 외식이 늘어난 탓인지 여전히 엥겔계수는 최고수준이다. 먹고사는 일이 팍팍하여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말고 다른 상황을 생각할 기력도 여력도 상상력도 사라진지 오래다. 올해도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될 확률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TV에선 쎄시봉의 캐롤이 들리고 이미 성스러운 밤이다. 산타할아버지는 사라졌어도 곳곳의 빌딩 벽엔 작은 전구들이 황홀한 빛을 연신 게워내고 있다.

 

 나태주 시인은 곡진한 아내 사랑으로 두루 호가 난 사람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는’ 일은 절대 시시하지 않다. 나도 이 대목에서 배운 그대로 동네빵집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야겠다. 가서 한때 불교도였다가 손자 손에 이끌려 잠시 교회에도 다녔다가 지금은 몸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아 잠자코 있는 늙은 어머니에게 계면쩍은 인사나 해야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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