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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계명/임보

향기로운 재스민 2014. 6. 12. 07:38

 

아내의 계명/ 임 보

 

 

늘 하는 훈계지만

전기밥솥에서

밥을 뜰 때는

숟가락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도 혼자

매실주 한잔 마시다가

(아내는 부재중)

밥솥에서 몇 숟갈 밥을 뜬다

 

밥주걱 찾기가 귀찮아

아내의 계명을 어기고

그냥 숟가락으로 밥을 푼다

 

아차,

숟가락 끝이 밥통 바닥에 닿는다

(도금에 상처 나면 큰일이다)

 

그렇지만

혹 아내가 발견해도

나는 주걱으로 펐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내 속이

이리 언짢은 걸 보면

계명은 역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인가 보다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시학, 2012)

 

  정월 대보름 풍속에 귀밝이술을 마시는 게 있다. 어른이 주는 술을 입에 살짝 대야 일 년 동안 귓병도 없고 남의 말을 잘 듣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귀밝이술이란 단어 속에는 소통 불능의 답답한 세대를 훈육하고 싶어 하는 선인들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을 것도 같다.

  주위에서 자신에게 해 주는 이야기는 대개 바람직한 행동 유형과 관련이 깊지만 자기 딴의 감정과 자존심에 옭혀 남의 이야기를 흘려듣게 되고 더러 고깝게 여기는 마음도 적지 않다. 사소한 일이라도 삐딱한 마음(부당한 요구와 처사에 대한 삐딱함은 예외로 치자.)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경계하지 않았을 때 갈등과 다툼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위 시는 소소한 일상에서 겪게 된 시인의 내면 풍경과 변화를 재미나게 그렸다. 시인이 아내의 요구를 잔소리라 하지 않고 계명이란 명명한 것은 웃음을 주려는 의도가 작용한 탓이겠지만, 그 바탕에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서다. 그런 마음이 상호 간에 귀를 밝아지게 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살다 보면 일부러 고집을 세우고, 한번씩 꾀도 피우고, 일탈도 감행하게 되지만 시인으로부터 귀밝이술 같은 말씀을 듣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계율로부터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될 거라고. 그런 불편은 사지 않아도 좋을 거라고. (이동훈 시인)

 

 

 

* 스스로 계명이란 말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아 다시 읽어보려고....(시와 시와에서)

 

 

임보의 팬티 (문정희 시를 읽은 후....)

 

 

*그렇구나/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그 주변을 맴돌며 한 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 붙들리면/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보라//참배객이 끊긴,/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보라/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봐/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남자들의 팬티를!

 

 

 

2014. 06. 12  향기로운 재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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