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 시집『사이』(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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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의 어느 시에서처럼 가을엔 어디를 가다 이쯤에서 길을 탁 잃어버리고 마냥 떠돌이가 되어 한 열흘 아무렇게나 쏘다니다 왔으면 좋겠다. 어정쩡한 실업자의 신분에다 배게 겸용의 작은 바랑에 수건 한 장, 입던 속옷 한 벌, 칫솔 등속만 챙겨 넣으면 그만이겠다. 아니 그조차도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추레한 행색으로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따라 가다 압록 다리께 식당에 들어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 사먹을 돈이면 흡족하겠다. 거기에다가 걷다 기어이 다리 곤해지면 아무렇게나 시골버스 잡아탈 노잣돈이나 꼬불쳐 놓으면 객사는 면하겠다.
만만하게 페이지 넘어갈 책 한 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으리. 작은 수첩과 볼펜 하나는 챙겨갈 것이나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대신 휘파람을 자주 부르리라. 마음 같아서는 손전화도 던져버리고 싶지만 늙으신 어머니 때문에 지니고는 떠나는데 그것 역시 자주 터지지 않기를 바라며, 함부로 카메라를 작동시키지도 않겠다. 쏘다니는 동안은 최대한 단순하고 무식해질 것이다.
산길을 걷다 상수리나무 열매 떨어진 길 따라 작정 없이 전진하다가, 가다가다 물빛이 반짝이는 곳 엉덩이 붙어먹기 좋을 펑퍼짐한 바위에 풀썩 주저앉아 양떼구름이나 쳐다보다가, 마침 된장잠자리가 북상하는 길을 따라 함께 매진한들 어떠랴. 길을 잃고 다시 사람 그리운 세상의 물가 어디쯤 오대천 골지천 몸을 섞는 아우라지 나루터에나 훌쩍 내달려볼까. 예순 고갯마루 아슬아슬하게 넘긴 몸, 노을빛 흔들리는 철든 바닷가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 어린 꿈이나 꾸어볼까. 새우깡 한 봉지를 사서 끼룩끼룩 퍼덕이는 갈매기나 희롱하며 놀까나.
나 마찬가지로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한 열흘, 아니 한 달 쯤, 아니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는 '자연인'의 시늉을 내며 주저앉는다 한들 어떠랴.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니 내가 달라져야 한다면 도리 없이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어야만 하리. 하지만 일단은 되돌아간다고 치고, 돌아오는 길 우포늪을 지나 고령 땅을 거쳐 화원쯤에 당도하면 너무 진했던 맑은 공기는 다 뱉어내고 사는 일이 막막한 그 까닭 시시콜콜 묻지 않은 채 나도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그것 이 가을의 소원이라고 하자.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