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

[스크랩] 가을날/ 구양숙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1. 4. 13:27

 

 

 

가을날/ 구양숙

 


못 견디게

생각이 떠나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더운 눈을 하고

걸어가는 몇 걸음 앞에서

미친 듯이 나뭇잎은 떨어지고

물든 이파리는 또 내 안에도 쏟아져


지금 너도

내 생각 하는구나

그래

가슴이 이리 아리구나

가던 길 멈춰 서게 한다


골목길 돌아 들어서면

낮은 추녀, 길가로 난 봉창

두런두런 식구들 소리 새 나오고

나풀거리는 단발머리 문 열고 나올 듯한데

영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너 살던 곳


어쩌지 못해 가던 길 그냥 가며

쌓이는 이파리 위에

눈코 입 새기고


너무 오래 품고 있어

형체마저 흐릿한, 그리운

그때 그 목소리도 얹고

그렇게

사람 사는 일도 계절이 깊어간다

 

 

- 한국 가톨릭 시선(가톨릭신문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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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어느 가을날 한 야외행사장에서 구양숙 시인을 우연히 만나 가던 길을 몇 발짝 함께 걸은 적이 있다. 시는 열심히 쓰시느냐, 요즘도 손자 봐주느라 바쁘시냐 따위의 물으나 마나 대꾸를 들으나 마나한 대화를 잠시 주고받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쭉 뻗은 젊은 여인을 돌아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참 곱다! 예쁘다! 눈부신 젊음이다! 여자인 내가 봐도 그런데 남자들이야 오죽할까” 잠시 걷는 동안 같은 말을 두 번은 더 들었던 것 같다. 저만치부터 내 시선이 그녀들을 추종했던 걸 간파했던 걸까. 하지만 살짝 곁눈질은 했겠지만 노골적으로 표시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보아하니 시인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감탄할 ‘깜’이 있으면 뭐든 망설임없이 즉각 경탄하고 느낌표를 아끼지 않고 날리는 체질임을 감 잡았다.

 

  이를테면 시인의 정직하고 투명한 감성 탓이겠는데, 계절의 변화에 즈음한 시인의 감성은 더욱 절정에 이르러 오롯해진다. 가을을 남보다 좀 심하게 타는 이 시도 그렇지만 시인의 다른 시 <봄날은 간다>에서는 “이렇듯 흐린 날엔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 주면 좋겠다.”라고 노래하였듯 감성충만한 여인인 것이다. 유난히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고 다감하게 반응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감탄을 잘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이 먹은 여자는 아무리 좋은 곳을 데려가도 무덤덤한 반면에 젊은 여자는 어딜 가든 무얼 사주든 사소한 것에도 감격하고 감탄하며 표시를 낸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감탄이 줄어드는 건 세상에 너무 익숙하고 닳아서일까. 세월이 흐를수록 감성의 물기도 말라가기 때문일까. 이 가설을 일정부분 수긍한다 하더라도 모든 여성이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대개의 여성 시인들은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계절마다에 푹 빠져서 절로 흔들리며 그리운 것을 더욱 그리워하며 누가 옆구리 쑤시지 않아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11월은 느낌표의 계절이다. 느낌표 많은 여자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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