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스크랩] 글짓기 /김종삼

향기로운 재스민 2012. 2. 1. 03:47

꽃과 함께 식사 / 주용일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꺽어왔다
그 여자를 꺽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문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글고 노란 꽃판도
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
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
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
함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집 <고요아침> 열린시학.




가득하다 / 유승도




산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개의 짖음도 흑염소의 울음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돌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목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하늘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금 내린 눈까지 지우며 눈이 내린다



[현대시] 2006년 4월호




이 한도 끝도 없는 유정이라니 / 고재종




누군가 봄바람에 꽃이 날리는 꿈을 꾸면
깨어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던가

하물며 시방 난분분 날리는 꽃비를 맞는
이 한도 끝도 없는 유정이라니!

저기 저 금결 은결 반짝이는 강물이거나
무장무장 번지는 연두 초록이라기보단

꽃을 만지면 향기가 손에 가득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꽃은 지는 것인데

나는 차마 본다, 수많은 시간의 부유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너무나 크고 빛나는 너의 눈물



봄날은 간다 / 이재무


봄날 오후 투명한 햇살
이런 날은 저승의 안방에까지도
훤하게 보일 듯하다
물 오른 신입생들의 통통 튀는 종아리
반짝이는 소음으로 세상은 청년이 된다
점심 거르고 전투처럼 치러낸 강의
내 달변의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불쑥 허기 몰려와 몸, 휘청거린다
먼 곳에서 크고 작은 길들은
꼿꼿이 고개 쳐들고 어디론가 바삐
달리고 있다 내가 뱉어낸 그 많은
장식의 허언들은 붕붕거리며 긴 복도
서성이거나 휴게실 담배연기 자욱한
소음에 갇혀 날개 다친 나비처럼 비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봄날 오후 햇살은 투명해서
이런 날은 맨살에 비단을 걸쳐도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밥그릇
비워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 뿐,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그리 간절하지가 않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나 한 순간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저 웃음의 화원 속으로
아직도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두꺼운 몸 밀어 넣으며
물 밖으로 아가미 내민 물고기처럼
헉, 가쁜 숨 몰아쉰다
모든 게 봄날 투명한 햇살 탓이다



시집 <푸른 고집> 천년의시작. 2004




가구 /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러듯이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아내의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세계].2003. 봄호


시작노트 : 사랑이란 소통이다.소통은 사랑의 척도이다.소통이 되지 못한 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관계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점차 사물화되어 가는 관계이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조금씩 사물화, 대상화되어 가는 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감자싹 / 최영숙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찬방 속에 박혀 있던
세 개의 감자에 싹이 났다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킨다는 감자싹의
성분은 솔라닌이다 물에 녹지 않아
호흡중추나 운동중추를 마비시킨다고 사전에는
씌어 있다 햇빛도 양분도 없는 곳에서
감자는 어떻게 싹을 틔울 마음이 들었을까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된다,
침묵도 어느 땐 필요한 법이다, 그런 것이었을까
비죽이 솟은 노란 싹이 꼭 뿔 같다
제 몸에 뿌리를 박고라도 번식하고 싶은 발아 그 슬픈 정수리
무엇을 찌를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내 마음이 나쁘다 이를테면 찬물에 온통 머리를 처박아도
빠지지 않는 사랑 같은 것 추억 같은 것
다 잊어도 나만은 안 잊는다 그런,
잊혀지고 낡아진 꿈을 밀어올리느라 품게 된
독 같은 것 질겨진 혓바닥 같은 것
그 다음에 오는 눈물이라는 것……
감자싹을 도려내는 손길이 아리다
깜깜중에도 눈뜨고 싶은 덩굴 속마음, 내가 너를 버리다니
사랑 평화 그리움 무엇보다 손 뻗어 잡아보고 싶은 푸른 하늘
주섬주섬 싹눈을 주워 흙에 옮긴다 잘 자라 다시만나자




땅도 햇볕도 물도 없는 세상에 잘못 던져진 감자싹. 하필이면 누군가가 먹으려고 찬장에 넣어 둔 음식에 뿌리를 내린 어린 생명. 그 예쁘고 노란 몸이 새 생명이 아니라 <뿔> 같다고 시인은 안타깝게 말한다. 누가 말리겠는가, 작은 틈만 있어도 뿌리를 내리는 저 생명의 고집불통의 본능을. (김기택 시인)




북어(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시집 <대설주의보> 민음사



새가 된 꽃, 박주가리 / 고진하


어떤 이가
새가 된 꽃이라며,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씨를 가져다주었다
귀한 선물이라 두 손으로 받아
계란 껍질보다 두꺼운 껍질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놀라웠다
나도 몰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가 아닌 박주가리 꽃의
새가 되고 싶은 꿈이 고이 포개어져 있었다
그건 문자 그대로, 꿈이었다
바람이 휙 불면 날아가 버릴 꿈의 씨앗이
깃털의 가벼움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꿈이 아닌,
꿈의 씨앗도 아닌 박주가리의 생(生),
어떤 생이 저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어느 별의
토기에 새겨진 환한 빛살무늬의 빛살이
저보다 환할 수 있을까
몇 며칠 나는
그 날개 달린 씨앗을 품에 넣고 다니며
어루고 또 어루어 보지만
그 가볍고
환한 빛살에 눈이 부셔, 안으로
안으로 자꾸 무너지고 있었다





새 / 김종삼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 지저귀고 있다.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천체에 반짝이곤 한다.
나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사람이다.




글짓기 / 김종삼


그 동뚝 아래
호숫가에서
고요의
피아노 소리가
지금도 들리다가 그친다

사이를 두었다가
먼 사이를 두었다가
뜸북이던
뜸부기 소리도
지금도 들리다가 그친다.
나는 나에게 말한다
죽으면 먼저 그곳으로 가라고.

출처 : 8코스 한라봉
글쓴이 : 동구리 원글보기
메모 : 다시 한번 보려구요. 애들과 같이.... 처음 오신 손님의 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