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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배/이지엽

향기로운 재스민 2012. 10. 23. 08:11

 

 

널배/이지엽

 

 

남들은 나무라는데

내겐 이게 밥그륵이여

다섯 남매 갈치고

어엿하게 제금냈으니

참말로

귀한 그륵이제

김 모락 나는

다순 그륵!

너른 바다 날 부르면

쏜살같이 달리구만이

무릎 하나 판에 올려 개펄을 밀다 보면

팔다리 쑤시던 것도 말끔하게 없어져

열일곱에 시작했으니 칠십 년 넘게 탄 거여

징그러워도 인자는 서운해서 그만 못 둬

아 그려, 영감 없어도 이것땜시 외롭잖여

꼬막만큼 졸깃하고 낙지처럼 늘러붙는

맨드란 살결 아닌겨

죽거든 같이 묻어줘

인자는

이게 내 삭신이고

피붙이랑게

 

 

- 격월간 <유심> 2012년 3~4월호

깊어가는 가을, 찬바람이 남도의 개펄을 휘감을 때면 널배의 뻘질도 활기를 띈다. 바구니 한 두개 겨우 얹어 놓을 정도의 공간을 가진 ‘널배’는 한쪽 무릎을 올려놓고 나머지 발로 개펄을 밀고 나가는 스노보드와 흡사한 나무 널빤지로 갯벌에서는 매우 유용한 이동수단이자 꼬막 등을 채취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고깃배라 할 수 있다.

간간하고 비릿하면서 쫄깃쫄깃한 맛의 보성 벌교 꼬막이 오동통 살이 오르면서 제철을 맞았다. 보성 벌교 앞 ‘여자만’은 다른 펄에 비해 입자가 곱고 부드러워 ‘참뻘’이라 불린다. 그래서 이곳서 자란 꼬막을 참꼬막이라 한다. 자연훼손이 최소화된 생태환경에서 손으로 잡은 싱싱한 청정의 맛이 일반 꼬막에 비해 값을 후하게 받는 이유다. 벌교 가서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꼬막잡이는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펄을 헤치며 해야 하는 일흔이 넘은 할머니들로서는 매우 고된 작업이다. 펄은 가만있으면 몸을 그대로 삼켜버리기 때문에 널배를 이리저리 밀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자식들이 펄에 나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할머니들이 널배 타는 것을 그만 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짭짤한 수입 때문이다. 그걸로 ‘다섯 남매 갈치고’ ‘어엿하게 제금냈으니’ ‘참말로 귀한 그륵’이고 말고다.

더구나 희한하게 삭신이 쑤시다가도 그 늘배를 타고 개펄을 누비기만 하면 ‘팔다리 쑤시던 것도 말끔하게 없어’지니 효자도 그런 효자가 없다. 널배를 타고 나간 할머니들은 해가 저무는데도 돌아올 줄 모르고 보물찾기 하듯 캐고 또 캐어 바구니에 꼬막이 넘쳐난다. 지친 몸이지만 절로 웃음이 난다. ‘아 그려, 영감 없어도 이것땜시 외롭잖여’

 

이맘때부터 내년 봄까지 남들은 몸을 움츠릴 시기에 벌교 일대는 오히려 삶의 활력이 넘친다. 그 힘의 원천이 찰진 개펄이고, 널고랑을 종횡무진 미끄러지는 널배이며, 그 널배를 타고서 잡아 올리는 꼬막이며 낙지이다. 해는 뉘엿뉘엿 서녘하늘로 떨어지고 개펄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널배가 낸 치열한 생의 길 위에서 할머니는 유언처럼 말씀하신다. ‘죽거든 같이 묻어줘’ ‘인자는 이게 내 삭신이고 피붙이랑게’

 

권순진

 

***  널배라는 말을 찾아....***

 

'맛있게 읽는 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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