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공광규 시인의 시들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 27. 17:23

놀랜 강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모과꽃잎 화문석


대밭 그림자가 비질하는

깨끗한 마당에

바람이 연분홍 모과꽃잎 화문석을 짜고 있다


가는귀가 먹은 친구 홀어머니가 쑥차를 내오는데

손톱에 다정이 쑥물 들어

마음도 화문석이다


당산나무 가지를 두드려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꾀꼬리 휘파람 소리가

화문석 위에서 놀고 있다.




애장터



입을 꾹 다문 아버지는

죽은 동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앞산 돌밭에 가 당신의 가슴을 아주 눌러놓고 오고


실성한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구욱구욱 울며 마을 논밭을 맨발로 쏘다녔다


비가 오는 날마다

누군가 밖에서 구욱구욱 젖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누구유!” 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그때마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젖은 마당에 상형문자를 찍어놓고 돌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가 그걸 읽고 돌밭으로 가면

도라지꽃이 물방울을 매달고 서럽게 피어 있었다.



말똥 한 덩이

청계천 관광마차를 끄는 말이

광교 위에 똥 한 덩이를 퍽! 싸 놓았다

인도에 박아놓은 화강암 틈으로

말똥이 퍼져 멀리 멀리 뻗어가고 있다

자세히 보니 잘게 부순 풀잎 조각들

풀잎이 살아나 퇴계로 종로로 뻗어가고

무교동 인사동 대학로를 덮어간다

건물 풀잎이 고층으로 자라고

자동차 딱정벌레가 떼 지어 다닌다

전철 지렁이가 땅속을 헤집고 다니고

사람 애벌레가 먹이를 찾아 고물거린다.




압록 저녁



강바닥에서 솟은 바위들이 오리처럼 떠서

황홀한 물별을 주워 먹는 저녁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 강도 저와 닮아

속마음과 겉 표정이 따로 노나 봅니다


강심은 대밭이 휜 쪽으로 흐르는 것이 분명한데

수면은 갈대가 휜 쪽으로 주름을 잡고 있습니다


대밭을 파랗게 적신 강물이 저녁 물별을 퍼 올려

감나무에 빨간 감을 전등처럼 매다는 압록


보성강이 섬진강 옆구리에 몸을 합치듯

그대와 몸을 합치러 가출해야겠습니다.



걸림돌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되 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달빛 호수



수천수만 장 연잎이

수면 위로 손을 뻗고 있네


공연장 무대를 향해 손을 뻗은

수천수만의 관중이네


달을 잡으려고 달빛을 받으려고

환하게 상기된 연꽃


달과 달빛은 연잎에 고이지 않고

호심에 호면에 둥 둥 떠있네


아름다운 것은 잡히지 않네

연잎은 달을 잡아본 적이 없네.




시골집에 가면서


휘어진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니

길이 왜 곡선으로 나 있는지 알겠네

아쉬워라, 논길에서 뱀을 만난 듯

진흙탕을 직선으로 달려가다 넘어진 친구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가면서

사선으로 어깨가 기운 사람들을 만나보니

늙어가는 나의 등이

왜 비탈로 저물어 가는지 알겠네


노을을 날개에 묻히고 온 새가

추녀 끝에 흐린 전구불로 매달리는 흙집

입매가 감나무 잎처럼 둥근 영정사진을 꺼내

해와 달이 둥근 비밀을 물어야겠네.



아침 풍경



회화나무에서 쥐똥나무 울타리로

쥐똥나무에서 명자나무 가지로

아침 새들이 옮겨 다닌다


새는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악보를 열심히

공중에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의 몸에 햇살이 쏟아지자

햇살이 깃털을 켜는지 깃털이 햇살을 켜는지

소리가 맑고 높다


새가 명자나무에서 수수꽃다리나무로

화락! 자리를 옮기자

붉은 질투가 꽃잎으로 진다.


 

 



적당한 거리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수목정원 한쪽

바위에 기댄 소나무 허리에 흉터가 깊다

일생을 기대보려다 얻은 상처인 것이다


일곱 가지 보물로 지은 법당이 있고

한량없는 하늘 사람들이 산다는 도솔천

지장보살도 어쩌지 못하는 관계가 있나 보다


내원궁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진달래꽃과 생강나무꽃이 거리를 두고 환하다

당신과 나, 적당한 거리가 도솔천이다.

 

 

 

 공광규시인 윤동주문학상 수상작 모음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대표 박영우)는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수상자로

충남 청양 출신 시인 공광규(孔光奎. 49) 씨를 선정했다. 수상작은 「놀랜 강」 외 9편이다.

시인은 1986년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후,

그동안 『소주병』, 『말똥 한덩이』 등 5권의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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