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여자를 위하여 (5) 이기철

향기로운 재스민 2013. 6. 5. 07:00


 

   Days Of Innocence _ Shannon Janssen

 

 

 

* 여자를 위하여(5) / 이기철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헤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시 읽는 시간

이기철

시는 녹색 대문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낸다

시는 맑은 영혼을 담은 풀벌레 소리를 낸다

누구의 생인들 한 편의 시 아닌 사람 있으랴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든 수저소리

그가 열었던 창의 커튼 그가 만졌던 생각들이

실타래 실타래로 모여 마침내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가 시를 읽으며 내일을 근심하랴

누가 시를 읽으며 적금통장을 생각하랴

첫구절에서는 풀피리 소리 둘째 구절에서는 동요 한 구절

마지막 구절에서는 교향곡으로 넘실대는 싯발들

행마다 영혼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

나를 적시고 너를 적시는

초록 위를 뛰어다니는 이슬방울들

시집『잎, 잎, 잎』(서정시학,2011)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이기철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

우리가 죽을 때 세상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무성하던 식욕은 어디로 갈까,
성욕은 어디로 사라질까,
추억이 내려놓은 저 형형색색의 길을
누구가 제 신발을 신고 타박타박 걸어갈까,
비와 구름과 번개와 검은 밤이
윤회처럼 돌아나간 창을 달고 집들은 서 있다.
문은 오늘도 습관처럼 한 가족을 받아들인다.

이제 늙어서 햇빛만 쬐고 있는 건물들
길과 정원들은 언제나 예절 바르고
집들은 항상 단정하고 공손하다.
그 바깥에 주둔군처럼 머물고 있는 외설스러운 빌딩들과 간판들
인생이라는 수신자 없는 우편 행랑을 지고
내 저 길을 참 오래 걸어왔다.

 

*이기철 시인의 시를 읽어보라고 추천하기에 찾아보며...

 

 

2013. 06. 05   향기로운 재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