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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향기로운 재스민 2013. 6. 15. 06:48

 

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 시집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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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이 피고 비가 오는 날이 있으면 바람 부는 날도 있다. 낙엽 지고 눈 오는 날이 있으면 모진 바람 차가운 날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바람 부는 날. 일기예보에도 없는 그저 나뭇잎 조금 흔들리고, 길에 버려진 껌종이조차 몸을 뒤집기는 어려운 날. 대충 남실바람 부는 날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내 안에서 부는 소슬바람.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어떤 이는 압구정동으로 차를 몰아가고, 어떤 이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가지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날마다 가고 또 가는’ 길을 간다.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가는 길 험하더라도 내 사랑의 오지인 그곳으로 나는 갈 수 밖에 없으므로.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들고 당신을 향해 가는 그 길은 숙명의 외길.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길.

 

 바람으로 인한 미세한 떨림, 진동, 너울 다 홀로 감당하며 혼자 외롭고 힘들지만 행복해 하며 가는 길. 그 길.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사방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막무가내로 간다. 오체투지로 달려간다.

 

 가면서 시름 다 잊고, 원망의 기울기도 낮추고, 그저 내 마음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당신을 향해 간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나 숨어버리듯 가고야 말리라.

 

 그 역에 당도하면 나 혼자만 내려 층계를 탕탕탕 뛰어올라 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숨이 벅찬 만큼 가슴도 벅차오를 것이다. 이제 곧 당신의 가슴 깊은 곳 핵심에서 불타오를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괴로움 다 불살라 버릴 것이다. 영원으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시가 노래로 된 가사도 좋고 친구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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