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

진흙탕/문정희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1. 23. 07:30

 

진흙탕

 

문정희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한 시인이 있지만

 나는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눈물이라 생각했지

 평생 한 사람이 흘리는 눈물이 대략 70리터라는데

 내가 흘린 눈물은 그 두 배하고도 반쯤은 더 될 거라 셍긱헸지

 항아리에 받았으면 큰 나무를 키웠을 거라 생각했지

 

 낮은 목소리로 :  한번은 나에게 시를 배우는 녀석들에게

 나를 키운 것은? 하며 마이크를 대는 시늉을 했더니

 녀석들은 밥! 돈! 어머니! 하고 대답했지

 더 낮은 목소리로 :  또 한번은 시인들 모임에서

 나를 키운 것은? 하며 마이크를 대는 시늉을 했더니

 희망! 기도! 감사! 하고 대답했지

 정말 썰렁 개그 같은 즐거운 시 창작 시간이었네

 

 그런데 베네치아에 와서 나는 알았네

 나를 키운 것은 진흙탕이었다는 것을

 참다 참다 터지는 뙤약볕 아래 가지런히 드러누운

 가을 짚단이 아닌 집단들의 눈웃음과 도끼들이

 봉두난발 쏘아대는 물대포들이 나를 키웠지

 나를 지금도 키우고 있지

 

 한밤중 뻣센 털 세우고 홀로 귀가하다

 나는 보았지 성난 사자의 그림자, 식식거리며 돌진하는

 깨어진 무릎뼈, 머리카락 올올이 묻은 검은 굴욕을

 나를 키운 저 빛나는 진흙탕을 확실히 보았지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 곧 연꽃이 필 거라 어찌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꽃사랑으로 부터 .... 

 

 

2013. 11.23   향기로운 재스민

 

 - 문정희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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