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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형권 시집 / 전당포는 항구다 / 창비 / 2013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1. 24. 16:47

 

박형권 시집 / 전당포는 항구다 / 창비 / 2013

 

 생명력이 펄떡이는 이미지와 구수한 입담으로 민초들의 소박한 삶을 그리며 ‘새로운 민중서정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박형권 시인의 두번째 시집. 시인은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삶의 현장에서 빚어낸 진솔한 언어로 자본주의 사회의 ‘낮은 생태계’에서 가난한 삶을 꾸려가는 서민들의 변두리 인생을 곡진하게 그려내면서 섬세한 감성의 실타래를 풀어놓는다. “거대도시 주변부 동네와 사람살이에 대한 증언”으로서 삶의 진정성이 오롯이 녹아든 시편들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제1부
아빠의 내간체—녹말중독자
날개 여사와 고구마 씨
파상 씨의 전파상
강원 씨의 건강원
김자욱 씨의 여명
육점 여사의 고기천국
지물포 씨의 항구에서
촌티
<뷰티플 플라워>를 지나가고 있다
예천 사과장수
백설기 씨를 만날 때
미니 붕어빵 민희 씨
조개할멈
<큰집곱창> 며느리가 저글링 중이시다
꽃을 먹다
자주 길을 잃지만

제2부
아빠의 내간체—우방(友邦)
벽화
자전거 도둑
지칭개 골목
풀잎 검객
풀꽃
허무의 힘으로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꼽등이 한마리
골목에 신호등이 없는 것은
당신은 있다
겨울비
짜장면 오토바이 충돌 사건
살구나무 생각

제3부
아빠의 내간체—쑥국 끓인 날
콩나물국 먹는 날
전당포는 항구다
궁둥이 자국
불러요 콜택시
장엄한 세수
열 수밖에 없다네
물결무늬 의자
득음(得音)
아내의 시간
중랑천 달빛
볼우물
빤쓰맨
이동화장실
나 호흡에 키스하리
은행나무

제4부
아빠의 내간체—실연의 힘
아버지의 걱정
화살나무의 과녁
소나기 공장
직박구리들의 서울
꽃다운 시
적란운
중랑교의 휴식
나팔꽃 담장
바람의 세계
네가 꿀배를 팔 때
기념사진
오목눈이 집
안골 가는 길

해설|이강진
시인의 말
 

 

 

낮고 고달픈 골목에서 노래하는 진솔한 살림살이

2006년 사십대 중반의 늦깎이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하여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형권 시인의 두번째 시집 『전당포는 항구다』가 출간되었다. 생명력이 펄떡이는 이미지와 구수한 입담으로 민초들의 소박한 삶을 그린 첫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사 2009)로 ‘새로운 민중서정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끌었던 시인은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삶의 현장에서 빚어낸 진솔한 언어로 자본주의 사회의 ‘낮은 생태계’에서 가난한 삶을 꾸려가는 서민들의 변두리 인생을 곡진하게 그려내면서 섬세한 감성의 실타래를 풀어놓는다. “거대도시 주변부 동네와 사람살이에 대한 증언”으로서 삶의 진정성이 오롯이 녹아든 시편들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사람 안 들기 시작한 방에 낙엽이 수북하다/나는 밥할 줄 모르고,/낙엽 한 줌 쥐여주면 햄버거 한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 맞나/낙엽 쓸어담아 은행 가서 낙엽통장 만들어달라 해야겠다/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펑 내리겠지/그러니까 젠장,/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밥 사먹어라(「은행나무」 부분)

박형권의 시는 ‘비시대적’이라 할 만큼 시단의 풍토나 유행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관념적인 언어에 기대어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길어올린 친근한 일상 언어로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시인은 자신이 속한 서울의 변두리 동네, “뷰티플 자본주의”(「<뷰티플 플라워>를 지나가고 있다」)의 주변부 인생의 곡절들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걱정거리라도 생활에 보태 쓰는 동네”(「촌티」)에서 “인간다운 생활”(「화살나무의 과녁」)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시인은 “바들바들 버티다가 처박히”는 “고달픈 서정”일 뿐인 자신의 시가 “누구도 구하지 못하는 무능”(「겨울비」)함을 자탄한다.

동부시장 시계탑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거리, 정오, 튀김 천막 내외가 점심상을 받는데/다붓하게 마주 앉아서 <시골밥집> 된장찌개를 놓고 흰밥을 먹는데/된장 한 그릇에 들어가는 두개의 숟가락이 서로의 입속에 깊숙이 혀를 밀어넣듯 서로를 먹이는데/길 위에서 먹는 밥이 달고도 달아 서로를 먹어주는 것이 달고도 달아/아, 먹는 일 장엄하다(「꽃을 먹다」 부분)

그저 “밥술이나 좀 뜨며 살고 싶”(「<뷰티플 플라워>를 지나가고 있다」)을 뿐인 시인 역시 “몸 움직여야 밥을 먹는”(「파상 씨의 전파상」) 엄연한 현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방세 두어달 밀리고 공과금 고지서는 쌓여만 가는” 생활 속에서 시인은 “오늘 하루 버티는 일에도 힘껏 목숨을”(「전당포는 항구다」) 걸며 살아간다. “시인 아빠는 입시원서비도 못 줘? 하는 칼날에/스윽 목이 베”(「풀잎 검객」)이는 시인의 모습은 “누구도 실업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자주 길을 잃지만」) 막막한 실업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들, “길 위에 쓰러져 자야만 하는” “청춘을 돌려받지 못한 아버지들”(「풀꽃」)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투박한 듯 맑고 싱싱한 서정의 언어

김치 하나에도 밥이 단 네 허기에게/학교 급식 말고는 균형있는 식단을 만나지 못한 너에게/압력밥솥 뚜껑 열듯/고슬고슬한 아빠의 내간체를 보낸다/매일 요리책을 보며 세상의 진귀한 음식들을 상상하다가/그만 위산과다가 된 너에게/기껏 겔포스 하나를 내밀어야 하는/아빠의 손이 무디어/김치 한쪽도 쭉쭉 찢어주지 못하였다/콩나물도 시금치나물도 조물조물 버무려서/고3인 네 입맛을 도와야 하는데/(…)/오늘도 아빠는 사발면 하나를 식탁에 올려놓았다/너를 우리의 살림으로 초대하는 일이/늘 이 모양인 나는 대체 어느 나라 아빠이냐(「아빠의 내간체―녹말중독자」 부분)

지난날 “허무를 좀 안다고/‘살아서 뭐하겠나’와/‘에라, 대충 살자’를 퍼뜨”리며 “나팔을 불었”(「허무의 힘으로」)던 시인은 어느덧 “내 어깨에 아이 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아내가 화장품을 안 사기 시작하였다는 것을”(「장엄한 세수」)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발 딛고 선 이 삶의 누추한 풍경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쌓아올려야 함을 자각한다. “늘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창틀이 마당과 맞물린” “반지하 단칸방”을 맴도는 땅 밑의 삶을 힘겹게 이어갈 뿐이지만, 시인은 비참함을 한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미래는 송이버섯처럼 번창하리”(「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라는 희망을 안고서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은 주인집 할머니가 우리 사는 지하방으로/자네 있는가, 새삼 다감하게 물어오는 날/기르는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오는 날/고맙게 받아서 국 끓이고 무쳐 먹지만/가끔은 콩나물이 싫다네/콩나물로 비유하면 지하방은 뿌리에 속해/집이 우리를 넉넉히 빨아먹어야 아지랑이 속에서/집은 바로 설 수 있다네/(…)/일하면 먹고 아니면 굶으며 결국 지하방에 도착하였지만/사실 우리는 집을 먹이는 뿌리혹박테리아/우리가 있어서 집의 부름켜에 따뜻한 피가 돈다네(「콩나물국 먹는 날」 부분)

시인은 지금 이곳, “발아래 세상이 보이기 시작”(「아빠의 내간체―실연의 힘」)할 때 비로소 저 너머 인간의 훈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희망의 세상을 꿈꿀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서 씻고 밥 먹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올라/밥벌이하러 가야” 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고단한 삶일지라도 시인은 “오늘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끝내 행복하고야 말겠”(「장엄한 세수」)다는 자못 비장한 다짐을 가슴속에 새긴다. “절망을 끌어안을 자궁이 없”(「김자욱 씨의 여명」)는 눈물겨운 생의 이면을 확신하고 있기에, 시인은 “사랑도 증오도 아닌 살아야 한다는 이유만을 높이 치켜들고”(「풀꽃」) “내가 나를 부르며/수없이 ‘깨어나라’고 외쳤던 그 막막한 어둠을 기억하며”, 오늘도 내일도 “여명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불러요 콜택시」)는다.

능소화 한 가닥 흐드러지게 피어/창문이 보일락 말락 한 지하방에는/방바닥보다 화장실이 높이 있어서/서너 계단 밟고 올라가야 변기통이 있다는 거/혹시 아나//우라질 놈의 변기통이 고장도 잘 나//우리 모두 배 속에 똥 모셔두고 사는 걸로/위안하며 살자//이렇게 꽃다운 시로 읊어가면서(「꽃다운 시」 전문)

 

추천사

 

박형권과 나는 서울 변두리 면목동에서 이웃하여 몇해 살았다. 저물 무렵 둘이서 자주 중랑천변을 걷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나를 시인이라고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도시빈민이에요.” 이 씁쓸한 한마디가 이번 시집의 여기저기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뷰티플 자본주의”(「<뷰티플 플라워>를 지나가고 있다」)의 뒷면에서 부대끼는 수많은 도시빈민들이 시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번 시집은, 그가 육안으로 본 거대도시 주변부 동네와 사람살이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장과 시구와 행간의 느슨함 혹은 산만함조차도 도시빈민들의 내면과 외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묘한 효과를 동반한다. 그것은 기실 박형권이 시인이면서도 도시빈민이라는 자의식의 시적 발현일 것이다. 하종오 시인

 

 

시인의 말

 

새벽 다섯시에 면목역 공원에 가면
오백원짜리 커피를 사 마실 수 있다
밤새 화단에서 술병처럼 뒹군
평균기온과 평균강수량의 사나이들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쪽의 마늘밭이나 과수원에 일 나가기 위해
나이나 체면 같은 것을 내던진 사람들이다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데
아마 변두리 인생의 간단치 않은 질량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오백원짜리 커피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면목역 공원의 새벽에서는 그들이 평균이다
그들만큼 내가 무거워야
‘미안하다, 당신들이 여기 있는 줄 몰랐다’ 하는
한 구절을 받아 적을 수 있다
내가 보지 못한 곳에 항상 있어온 당신들,
당신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가 알고 싶어서
오늘 새벽 당신들 몫의 커피 한 잔을
축내고 돌아왔다
항상 당신들이 있는 것을 봄으로써
내가 있는 것을 안다

2013년 7월
박형권

 
 

 

출처 : 시와 시와
글쓴이 : 전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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