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오무린 것들/유홍준

향기로운 재스민 2014. 6. 7. 08:04

 

 

오므린 것들/ 유홍준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이 있다

 

 

- 시집 북천 까마귀』(문학사상사, 2013)

 

 

 

*  오무리고 있는 모습은 소심해 보이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고

    조심하는 모습도 보이고....

 

 

2014. 06. 07 

향기로운 재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