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스크랩] 남겨진 가을/ 이재무

향기로운 재스민 2014. 11. 29. 07:22

 

 

 

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 시집『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

 

 11월의 마지막 하루까지 가을이라며 바락바락 우겨가며 가을을 우려먹는 이에게도 이제 가을은 다 가버렸다. 늦은 저녁 인적 없는 동네공원 앞을 지나다가 찬바람에 절로 흔들리는 그네를 보았다. 굴참나무 껍질처럼 덕지덕지 미련한 생 문득 되돌아본다. 살아온 날의 대강과 지난 가을을 흔들리는 셀프카메라에 담아 조심스럽게 인화한다. 여물지 못한 추억은 아름답지 않으니 치사하고 말 것도 없이 그저 흐릿하다. 이건 탐색이 아니고 반성은 더욱 아니며 명백한 한탄에 대한 증빙이다. 모조리 쓸모없는 일과 무용한 생각들.

 

 이미 다르게 살기에는 너무 늦었다. 관성을 멈출 제동력마저 딸린다. 다리가 저려온다.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태엽 풀린 나무탱크처럼 방향을 잃고 아무데나 처박힌다. 무릎타박상에 멍깨나 들었다. 짊어지고 갈 등짐의 근수가 나갈수록 인생살이가 유익해질 것이라 믿었던 착각이 한참 갔다. 그 무게를 덜어낸 만큼 삶은 경쾌하고 번민은 줄어들 것이란 충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지나간 시간의 끝자락에서야 깨닫는다. ‘세월의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먼 훗날’이 아닌 지금 당장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그러나 볼 장 다본 생이라 스스로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 이제부터라도 소란스럽지 않은 단아한 일상을 꿈꾸어 본다. 남은 시간에겐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 누운 부처처럼 하루의 절반쯤은 비스듬히 늘어지는 것도 허용할 셈이다. 욕망이 소진되어 죽음조차 두렵지 않기를 소망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부러 꺼려하진 않겠지만 지금보다 더 단란해지고 싶다. 이미 둘레의 평판 따위는 상관없으므로 그럴 듯하게 보이려는 수작 따위는 그만 두겠다.

 

 흉하거나 말거나 빠진 이빨조차 당분간 방치해둘 것이다. 어떤 이는 멘탈을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큰 아이가 타다 내게 버린 주행거리 30만 킬로의 개스차도 길 위에서 덜컥 서버리기 전까지는 손수 내다버리진 않을 것이다. 얼마간의 오래된 채권조차 독촉하진 않겠다. 그 어느 것도 개의치 않으리라. 가진 자의 겸손에 앞서 루저의 당당함을 먼저 보여줄 것이다. 누군가의 손톱 끝에 물들여진 봉숭아물이 첫눈 오기 전 다 사라진다 해도 모른 척 할 것이다.

 

 대신 감당하지 못할 청춘일 때는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작은 활자체의 '三省版 世界思想全集'을 눈이 허락하는 한 느리게 읽어가길 희망한다. 비탈에 선 외로움을 다독거리며 한쪽으로 기울어진 얼굴엔 하회의 탈로 보완하겠다. 반성할 것이 나날이 줄어들길 기도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때가 되면 가버리겠다.

 

 

권순진

 


Rare Bird - Sympathy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애들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