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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참외/오탁번

향기로운 재스민 2015. 3. 16. 07:56

개똥참외/ 오탁번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자유가

싱싱한 평화가 시장바닥에 쌓여 있는 주말

배낭에 한 주일의 불만을 담아

버너에 일곱밤의 성욕을 채우고

떠났다 시외로 가는 버스에 실려

이제하의 푸르디 푸른 냉소는

내 방 오른편 벽을 사시사철 간지럼 태우는데

그대는 아는가, 개똥참외를

참외를 씨채 먹은 사람이

오 하나님 당신의 양이 그 참외를 먹고

된똥을 누면 참외씨는 무슨 보석인 양

빛나며 대지에 떨어져서

수캐든 암캐든 운수좋은 날의 개가 그 똥을 먹고

들판을 달리며 달리며

교미도 붙고 별 지랄 다 하고 나서 컹컹 짖으며

개똥을 눌 때까지

사람과 개의 밥통과 창자의 깊고 질긴 어둠을 헤치고

다시 나오는 씨앗

그 빛나는 자유가 흙에 묻혀서

또 그 가을과 겨울의 어둠을 지내고

이듬해 봄에 싹이 트는 진실을

들판에 돌서덕에 밭두럭에 자라는 개똥참외의

그 개같은 똥같은 참외같은 보이지 않게 기어다니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요즘 자유의 드넓은 높이를

아는가 모르는가

모를 것이야 오늘밤 그대의 냄새나는 화실에서

푸른 고름이 낭자한 냉소를 아이스크림처럼 빨며

저 청조나 영은이의 아름다운 바람을

잡초들의 보이지 않는 뿌리를

씹어볼까나 마셔볼까나 조져볼까나

화가도 시인도 작가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이 시대의 무이한 예술가

이형 제하여,

마흔을 넘기고도 죽지 않는 흔한 시인들이여

개똥참외를 쪼갤 과도를 준비하라

더러운 보이지 않는 자유를 위하여

사람과 개의 밥통과 창자의 어둠 속에서 벌어질

흔적도 없는 빛나는 자살을 위하

 

 

- 시집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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