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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장석주 시인 ( 시모음 )

향기로운 재스민 2017. 4. 24. 06:52

장석주 시인 ( 시모음 )  

 

 

     장석주

          소설가, 시인           

          출생1954년 1월 8일

출생지대한민국 충남 논산시
데뷔1975년 월간문학 '심야'
경력MBC 행복한책읽기 자문위원회 위원
수상2010년 제1회 질마재문학상

 

 

 

 

바람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몇 개의 길들이 내 앞에 있었지만
까닭없이 난 몹시 외로웠네

거리엔 영원불멸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달리고
하늘엔 한 해의 마른풀들이 떠가네
열매를 상하게 하던 벌레들은 땅 밑에 잠들고
먼 길 떠날 채비하는 제비들은 시끄러웠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의 바쁜 발길과 웃음 소리
뜻없는 거리로부터 돌아와 난 마른꽃같이 잠드네
밤엔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나
오래 달빛 흩어진 흰 뜰을 그림자 밟고 서성이네

여름의 키 작은 채송화는 어느덧 시들고
난 부칠 곳 없는 편지만 자꾸 쓰네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내가 가지 못한 길을


한사코 마음만이 분주히 간다.

 

내가 가는 길에 마음이 없고


마음 가는 길에 내가 없으니


저녁답 가던 길을 버리고 말다.

 

 

 

 

썰물

저 물이 왔다가 서둘러 가는 것은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저 너른 뻘밭은
썰물의 아픈 속내다

저 물이 왔다가 서둘러 가는 것은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저 뻘밭에
여름 철새 무리의 무수한 발자국들은
문자를 깨치지 못한
썰물의 편지 같은 것

썰물이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도
저렇게 서둘러 돌아가는 것은

먼 곳에서
누군가 애타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석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
살아 있는 것들의 끝없는 괴로움과
죽은 것들의 단단한 침묵들,
새벽 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찢긴 구름 몇 장,
공복과 쓰린 위,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뿐이다.

말하라 붕붕거리는 추억이여.
왜 어떤 여자는 웃고,
어떤 여자는 울고 있는가.
왜 햇빛은 그렇게도 쏟아져내리고
흰 길 위에 검은 개는 어슬렁거리고 있는가.
구두 뒷굽은 왜 빨리 닳는가.
아무 말도 않고 끊는 전화는 왜 자주 걸려오는가.
왜 늙은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고
공원의 비둘기떼들은 한꺼번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겨울나무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가을 병(病)

아우는 하릴없이 핏발선 눈으로
거리를 떠돌았다. 아우는
몸 버리고 돌아와 구석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오, 아버지는 어둠 속에
헛기침 두어 개를 감추며 서 계셨다.

나는 저문 바다를 적막히 떠돌았다.
검은 파도는 섬기슭을 울며울며
휘돌아 사납게 흰 이빨을 세우고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절망은 단단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낡은 이 세상
가을 해 떨어져 저문 날의 바람 속으로
마른 들풀 한 잎이 지고 어둠이 오고
나는 얼굴 가득히 범람하는 속울음을 참았다.

살 부비며 살아온 정든 공기와
친밀했던 집 안팎 구석구석의 생김생김
아우와 누이와 아버지가
작은 불빛 몇 개로 떠올라
마람에 하염없이 쓸리는 것을 보았다.

오, 그때 세상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을 저문 바다 섬과 섬 사이
그 사이를 재우고 있는 것은
어둠과 바람과 파도뿐임을 알았다.

 

 

 

 

입맞춤

너는 봉인된 편지
입맞춤으로
네 몸의 적멸보궁 네 몸속의 편지를
꺼내 읽는다 그 바닷가다
바닷가의 바람에는 소금이 녹아 있다
이 바람 속에서
일체의 꿈들을 중절당한 내몸이
낱낱의 원소로 해체되어 버릴
때까지
나는 서 있고 싶다

벼랑의 끝에 가 본 자만이
바다를 본다
절망해본 자만이 사랑을 안다
나는 이 바닷가에서
너와 처음으로 입을 맞춘다
오오 너는 언제나 밤보다 빨리 온다
바다는 잠잠하고
너는 꿈틀댄다 바람의 정령들도
우리의 입맞춤을 시샘한다

내 입술과 맞닿은
네 수정의 입술에서 핀
일곱 송이의 수선화꽃 그 황금빛 수선화꽃 지고
아침과 이슬이 진다
너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신의주
너는 손길이 닿지 않는 수평선
너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노을
너는 창 밑 화단에 떨어진 사르비아 꽃잎
너는 사막
너는 죽음

하지만, 하지만,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나?
오래 굶주린 내 피는
소리를 지른다

 

 

 

안개, 안개

네 생에 최고의 날들은 지나갔어
안개는 내게 가만히 속삭인다
그럴까, 그럴까.....
그제 심은 벽오동나무가
나를 앞질러 상심을 드러낸다
아직 심장의 피들이 이렇게 붉은데

저 안개 가사袈裟를 휘감고
물가에 도열해 있는 나무들은
물없는
텅빈 바닥을 굽어보고 있다
적산가옥 몇채로
내마음이 내려앉고
내 견령능력도 문맹이나 다름없이 바닥 났으니
그건 도무지 슬픈 일이겠다

살라가야 할 많은 날들이
저기 수줍게 핀 수수꽃다리 꽃보다 환해진다
새벽 안개 속에
망명자처럼 자취 감추었던 물들이 돌아와
끔찍하지만 다시한번, 하는 얼굴로
저 아래 가득하다

 

 


 

갈색 빵을 위한 노래

한 개의 잘 구워진 갈색 빵 속에
짐승의 살찐 앞가슴과 같은
연하고 부드러운
땅의 감촉이 있다.
열이틀간의 비의 신선한 냄새와
하늘의 우울이 있다.
급하지 않게 허공을 더듬어가며
곡식의 알갱이를 익히던 바람과
밤의 차가운 적막이 있다.
5개월간의 차가운 새벽 기운,
해돋는 아침의 타오르는 기쁨이 있다.
잡초를 뽑고
흙을 북돋아주던
농부의 거칠고 무뚝뚝한
노동의 손,
수확의 손이 있다.

한 개의 잘 구워진 갈색 빵 속엔
일곱 살짜리 딸애의
물어뜯는 첫 이빨 자국,
그 오랜 세월의 단단한 견딤의 부서짐,
말랑말랑한 혀의 즐거움이 있다.
어둡고 뜨거운 식도,
지옥처럼 요동하는 위,
그리고 길고긴 터널의 여행이 있다.
빻아지는 고통을 넘어서서
굽는 불길의 고통을 넘어서서
태어나는 한 개 갈색의 빵.

멋진 혈관의 피가 되어
허파의 들숨과 날숨이 되어
노동하는 손의 억센 힘이 되어
오늘 또다시 구워지는 한 개의 갈색 빵.

내일 구워질 열 개의 갈색 빵.
모레 구워질 천 개의 갈색 빵.

 

 

 

 

냉이꽃

여기 울밑에 냉이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보라, 저 혼자
누구 도움도 없이 냉이꽃 피어 있다!

영자, 춘자, 순분이, 기숙이 같은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계집애들 이름 같은,
촌스럽지만 부를수록 정다운
전라남도 벌교쯤에 사는 아들 둘 딸 셋 둔
우리 시골 이모 같은 꽃!

냉이꽃
어찌 저 혼자 필 수 있었을까.

한 송이 냉이꽃이 피어나는 데도
움트는 씨앗의 꿈틀거리는 고단한 생명 운동과
찬 이슬,
땅 위를 날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몇 날의 야밤과
피어도 좋다는 神의 응락,
줄기와 녹색 이파리를 매달고 키워준 햇볕과
우주적 찰나가 필요하다!

 

 

 

 

크고 헐렁헐랑한 바지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옷은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 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소리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려먼
진작 바지의 독재에 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 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나비

나비는 날아간다.
나비는 햇빛 속을 떠간다.
나비는 무게를 채 갖지 못한 가벼운 넋이다.
나비는 모든 소리를 인멸하고 떠가는 한 점 정적이다.
세상이 시끄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
나비는 날아간다.
최루탄 가스 자욱하게 피어 있는 거리를 지나
땅거미 내린 어둔 땅을 지나
누군가의 버려진 무덤을 지나
가뭄으로 말라버린 강을 지나
나비는 날아간다.
나비는 햇빛 속을 떠간다.
혼자 날아가지만
세상을 혼자 가는 것은 아니다.
지렁이랑, 개미랑, 게랑, 진흙뻘 속의 조개랑,
별과, 유령과, 바람과
함께 간다.
도무지 남을 해칠 줄 모르는 것,
세속의 아우성을 한 점 고요로 제압하는 것,
나비는 날아간다.
맹목의 겨울이 오기까지
나래를 펴고
나래를 찢겨
어느 산정에서 숨질 때까지
나비는 날아간다.
이승의 한 점 슬픔으로
나비는 햇빛 속을 떠간다.

 

 

 

 

애인 ( 愛人 )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을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은 끝이 없어
한 번 엇갈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 놓고
슬픈 날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 언덕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먼지가 되어 먼지의 꿈을 꾸며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내가 다시 일어난다면
수천 개의 일요일이 한꺼번에 오리라

친구들은 하나도 없고
내가 걸었던 길이며 집들 남김없이 사라져버린 뒤
나 길 잃고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되리

나를 감싸는 허탈과 슬픔의 이유를
누구에게도 묻지 않으리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새들은
내게 잊혀진 섬의 소식을 실어 나른다
난 한 번도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새들은 나를 무서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생선 내장에 썩는 악취로 진동하는 도시를 버리고
여름 태양이 바다 한가운데 피워낸
돌의 장미, 발 밑에
수많은 청어들을 기르는 섬으로 가리라

달빛 속에 잠든 해안을 거닐며
배고프면 해안을 뜯어먹고 벌거벗은 채 잠든다
심심하면 물 속을 헤엄치며 청어들과 놀고
몇 번 하품도 하고
마침내 내가 먹고 버린 청어가시들과 함께
실종되리라

푸른 달빛에 바래진
화석 되리라

 

 

 

 

난 건달이 되겠어

그동안 너무 오래 일만 하면서
살았어
흰 손 흰 얼굴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데도 말이야
책 읽는 것도 신물이 나
망상은 줄지 않고
미친 피는 잠들지 않아
구름 구두를 신고
카페에 나가 에스프레소를 마셔야지.
카페 통유리 너머로
사람들과 흘러가는 구름과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후의 한 때를 보내야지.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젊은 여자를 향해
휘익 휘이익 휘파람을 불어보겠지.
그러면 여자가 돌아볼테지.
눈웃음 치며 그 여자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나와 함께 춤출 시간이 있느냐고.

 

 

 

 

12월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잠시 눕는 풀

풀은 조용하다.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뿌리의 정적 쪽으로 마음을 눕히고 풀은 조용하다.

바람은 흐린 하늘을 쓴 소주처럼 휘저으며
벌판을 들끓는 아픔으로 흔들며 온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과
흔들며 지나가는 것 사이의 긴장은 고조된다.

시간은 어디론가 숨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바람은 오고 잠시 풀은 눕고,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풀은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눕히지만
끝내 바람은 흙 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를 흔들지 못한다.

 종일을 빈 벌판은 푸른 모발을 날리며
엎드려 있고 종일을 빈 벌판은 통곡을 하며 엎드려 있고
또 다시 바람은 불어오고 풀은 잠시 눕고

다시 풀은 일어서며 풀은 조용하다

 

 

 

 

 

일획 ( 一劃 )

초봄에 매화 꽃눈 돋다,

 어제와 다른 하늘 밑 내닫는 호랑이다,

호랑이 눈동자다, 저 꽃들!
아버지 가고 맞은 늦봄 천지에 모란꽃 붉다
벚 꽃잎 분분하게 무너진다,

 저 끊긴 인연들
자다 깨다 설친 밤 개구리 떼 서책 읽는 소리
물 빠진 개펄에 혼자 서 있는 민댕기물떼새 오동은 곧고 소나무 굽었다,

 무릇 금생이다 풍란이 허공에 붓을 친다,

획이 굽은 듯 곧다
하마 당신 올까, 무서리에도 꿋꿋한 까치밥
아, 살아 움직인다,

명월 아래 기러기 떼 서체 (書體)
매화 국화 다 진 뒤 초겨울 앵두나무에 박새
가는 길에 꽃 없어 섭섭할까 가지마다 설화(雪花)!

 

 

 

 

시골로 내려오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정부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버렸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당신의 경전은 더 이상 유 효하지 않다

 내가 지켜야 할 계율은 내가 만든다

당신을 떠나면서 점 집에 갔더니 구설수를 조심하라고 한다

구설수란 누구에게나 붙는 국 민연금이거나 지방세 같은 것이다

당신을 버렸지만 길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릇 길들이란 땅 위에 세운 당신과 나의 삶의 유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이 바뀐다

 길 없는 길 위에 서서 새 길을 꿈꾼다

끼니때가 되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밥물이 끓는 동안엔

슬하의 것들 을 돌보아야 일과는 매우 신성한 것이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 가 되면 눈을 붙인다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고 립이 아니다

심심한 큰 개가 희디흰 햇빛 속에서 저보다 몸짓이 작은
강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마구 흔들어댄다

 어디에서나 힘없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노란 수박꽃 밑에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 부화하지 않는 것들은 끝내 부화하지 못한다

올 봄에 심은 나무 중에 석류나무가 가장 늦게 잎을 피워낸다

저수지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비가 없다

벌써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죽었다

물의 문하에 들 어선 자에게 이보다 더 큰 실망은 없다

나는 절망함으로써 절망을 채찍 질하며 건너갈 것이다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겐 삶이 없다

 이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내 전생은 라마승이었으니 마흔 너머 부터는 라마승의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였더니
마음의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문다

시골에 오니 비로소 희망이 있었다

 

 

 

 

소년과 나무

황조롱이 떠 있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아라.
황토밭 둔덕 저 너머
어머니의 등 뒤로 시린 하늘을 보라.
한겨울 수만의 흰나비들이 날아가던
그 저녁을 기억하라.
옹알이를 하는 아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혼자 흙을 파먹고 논다.
내가 발음하는 모국어에는
햇빛과 바람과 진흙과 풀물이 들어 있다.
모국어를 발음할 때마다
햇빛과 황토와 풀냄새가 코끝으로 왈칵 밀려든다.
마른 소년은 병 속에서 자란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실내의 투명한 병에는
흰 파뿌리들이 자란다.
정오의 희망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어른들은 출타 중이다.
빈집에서 심심함이 줄기를 뻗고 잎을 피우더니
이내 집 안을 가득 채운다.
심심함이 피운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며
소년을 달랜다.
소년은 여전히 우울하다.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무들은 저마다 방을 하나씩 가졌고
소년은 그 방에서 잠을 자고
주사위를 갖고 놀기도 한다.
소년이 한 나절을 보내고 나무에서 나왔을 때,
어느덧 장년이다.
어제는 간송미술관을 다녀왔다.
오후에는 이빨을 닦고 나가서
복권 두 장을 샀다.
저물 무렵 거리에서 누군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개미야, 개미야, 하루종일 너는 얼마나 가니

온통 백색 광선으로 들끓는 여름 한낮을 쉬지 않고

 기어서 기어이 가야 할 곳이 있다,

교묘한 뱀들아, 덩치 큰 야생 쥐들아
두꺼비들아, 賣淫의 개들아,

나는 더 이상 방관자가 아냐,

 

 

 

 




누군가 이 육체의 삶,
더 이상 뜯어먹을 것이 없을 때까지
아귀아귀 뜯어먹고 있다!
이스트로 한없이 부풀어오른 내 몸을
뜯어먹고 있다!


 

 

 

자전거 타고 가는 길

저문 시골길을 민간인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시골의 길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인생의 길들은 비포장이다
길 양 켠 웃자란 고추밭 위로 털뭉치 같은 어둠이 툭툭 떨어져 쌓인다
저 아래 물이 가득 찬 금광저수지에 뜬 달은
은박지를 오려붙인 것 같다
달 아래 새들은 세계의 어떤 쓸쓸한 징표다
뻑뻑하기만 한 가난도 조금은 헐거워지는 밤
어디선가 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잊자

그대 아직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대 아직 누군가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그대 인생이 꼭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그대 아직 누군가 잊지 못해
부치지 못한 편지 위에 눈물 떨구고 있다면
그대 인생엔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제 먼저 해야 할 일은
잊는 것이다

그리워하는 그 이름을
미워하는 그 얼굴을
잊지 못하는 그 사람을
모두 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잊음으로써 그대를
그리움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잊음으로써 악연의 매듭을
끊고 잊음으로써 그대의 사랑을
완성해야 한다

그 다음엔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실패한 인생엔 상자가 없다

이 저녁 누군가 문설주에 기대
울고 있다면
내 탓이라고 알아다오
이 세상 어느것 한 가지라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이 아침 감꽃이 마당에 함부로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것은
내 탓이다,
나의 후덕함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새들에게
어깨를 툭 치고 스쳐가는 바람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상냥한 미소를 짓지 못했던 것은
아아 이 아침
인생의 쓰디쓴 실패를 자인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졌던 상자들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상자마다 피어나는 꽃들
상자마다 가득했던 별들
상자마다 가르릉거리는 예쁜 새끼고양이들
......
그러나, 이제 내겐 상자가 없다

 

 

 

 

총체적 난국의 세월 속에서

아무하고도 약속 없는 점심
혼자 짜장면 한 그릇 비우고 돌아오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막막함과 무관하게 가로수의 잎들이 쓸데없이 날린다.
금방 도착한 석간의 행간들마다 웅크리고 있는 어둠에서
'총체적 난국'의 한 징후를 냄새 맡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입 속에는 짜장면과 함께 씹은 양파 냄새가 진동한다.
스산하여라, 근심 속에서
한 세상이 꽃 피고 진다.

보라, 낮은 짧고,
어둠은 쉽게 내린다.

철문은 녹이 슬고,
문 위에 일렁이던 햇빛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물 빠진 뒤 뻘 속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아가미를 한껏 벌
렁거린다.
내가 지고 가는 짐, 짐승 같은 세월이 너무 무겁다.
세상을 알 만큼 알고 난 뒤
몸이 먼저 아는 늙음에 대한 예감이여.

내 사후의 바람 속을 거슬러올라가는 한떼의 새들을 본다.
새들이 꼭 성냥개비 끝에 쬐끔 묻은 유황 같다.
새들은 어둠 속을 발화성 씨앗을 물고 난다.

 

 

 

 

燈에 부침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燈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內壁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鮮血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燈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燈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燈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自由
燈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燈을 켜자.

 

 

 

 

 

술 마시는 남자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 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꽃에 바치는 시

마침내 뿌리가 닿은 곳은
메마른 흙이 가두고 있는
세상이 가장 어두운 시절이다.

흙 속에 길 찾지 못한 죽음들
흙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욕정들
흙 속에 죄 많은 혼령들
흙 속에 나쁜 욕망들

저렇게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이
세상 가장 어두운 시절의
죽음들과 욕정들과 혼령들과 운명들을 품고
피어난 것이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님은 강을 건너지 말라 하지만


기어이 강 건너지 아니 하고는


끝내 갈 수 없으니


과녁 향해 날으는 한 촉 화살의


두려움과 떨림으로 깊은 강을 건너네.

 

 

 

 

소년과 나무

황조롱이 떠 있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아라.
황토밭 둔덕 저 너머
어머니의 등 뒤로 시린 하늘을 보라.
한겨울 수만의 흰나비들이 날아가던
그 저녁을 기억하라.
옹알이를 하는 아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혼자 흙을 파먹고 논다.
내가 발음하는 모국어에는
햇빛과 바람과 진흙과 풀물이 들어 있다.
모국어를 발음할 때마다
햇빛과 황토와 풀냄새가 코끝으로 왈칵 밀려든다.
마른 소년은 병 속에서 자란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실내의 투명한 병에는
흰 파뿌리들이 자란다.
정오의 희망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어른들은 출타 중이다.
빈집에서 심심함이 줄기를 뻗고 잎을 피우더니
이내 집 안을 가득 채운다.
심심함이 피운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며
소년을 달랜다.
소년은 여전히 우울하다.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무들은 저마다 방을 하나씩 가졌고
소년은 그 방에서 잠을 자고
주사위를 갖고 놀기도 한다.
소년이 한 나절을 보내고 나무에서 나왔을 때,
어느덧 장년이다.
어제는 간송미술관을 다녀왔다.
오후에는 이빨을 닦고 나가서
복권 두 장을 샀다.
저물 무렵 거리에서 누군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둠 속을 들여다본다

아무 붙잡을 것 없는 허공에
가 닿은 내 눈길
재개발 지역 너머 강둑 위의 노을.

지친 내 어깨를 미는
가벼운 바람조차 힘겹다.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이윽고 단층집들에 불이 켜진다.

바람이 달려가는 허공은 울고
어둠은 굶주린 들쥐떼처럼 달려든다.
추위 떨며
옷깃을 여미면
누군가 어둠 속에서 나를 부른다.
어둠 속에 서서
오래 어둠 속을 들여다본다.
누가 자꾸 나를 부른다.
난 아직은 갈 수 없는데
누가 자꾸 나를 부른다......

날 부르지 말아라,
세상의 길들이여

난 어둠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둠은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메모 : '대추 한 알'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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