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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公里碑)/ 호찌민

향기로운 재스민 2017. 5. 26. 19:59


이정표(公里碑)/ 호찌민


 

높은 곳에 있지도

먼 곳에 있지도 않으니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닐지니

그대는 그저

큰길가에 서 있는

보잘 것 없는 이정표


지나가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주어

그들로 하여금 길을 잃지 않도록 해주고

아직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만 하는지를

알려 줄 수 있을 뿐

 

- 시집 옥중일기(지식을 만드는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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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베트남 여행 중 519일이 마침 호찌민의 127회 탄신일이었다. 1890년생인 호찌민은 열망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장에는 내가 죽은 뒤 거창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조용히 화장해 달라고 적혀 있었지만 공산국가의 지도자들이 대개 그렇듯 그의 시신은 하노이 시내 바딘 광장에 방부 처리되어 잠들어있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바딘 광장은 1945년 일본 왕이 연합군에 항복한 며칠 후인 819, 호찌민이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관중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낸 곳이다. 그는 이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와 생명, 자유, 행복을 주었다.”라고 외쳤다.


  그는 죽어서도 시민들에겐 살아있는 영웅이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호찌민의 삶과 말 한마디는 일상생활 철학의 푯대와 이정표가 되었다. ‘조국과 결혼한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 가슴 속에 영원불멸의 존재이다. 바딘광장에는 호찌민의 묘소와 박물관뿐 아니라 호찌민이 아주 잠시 머물렀던 노란색 옛 주석궁이 있다. 겉으로만 봐도 꽤 화려한 이곳은 본래 프랑스 식민지 시절 총독부였는데 그는 이 관저를 쓰지 않고 따로 작고 허름한 집을 지어 그곳에 기거했다. 아이들이 와서 수염을 당기면서 '파파 호호'라는 애칭으로 불러주면 미소 지으면서 손수 베트남 고유악기를 치면서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며 같이 놀아주곤 했다. 그는 일부 잘못 알려진 고약한 공산당 영감탱이가 아니라 인자한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반은 레닌 반은 간디'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현실적 도구로서 공산주의를 신봉하였으나 공산주의자이기에 앞서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다. 실제로 그가 추진한 강령들은 과중한 과세와 강제징집의 폐지, 하루 8시간 노동제 도입 등 온건한 것들이었으며, 토지개혁에 있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온갖 시련과 고초를 이겨내고 전 생애를 바쳐 희생한 결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호찌민은 공무원 부패 척결을 위하여 다산의 목민심서를 공무원의 필독서로 장려하였다. 목민심서를 알게 된 계기는 박헌영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선의 대사상가인 정약용을 흠모하여 다산의 제삿날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호찌민의 고결한 헌신은 인간에 대한 절망을 희망으로 안내하는 푸른 이정표임에 틀림없었다. 그에 대한 찬사는 범세계적이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사이공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완전 철시하고 애도하였다. 당시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조차도 그에게 정중한 언어로 조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는 긴 조사에서 정치적 이유로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그에게는 숭배와 경애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썼다. 타임지는 그를 표지인물로 채택하였고 이렇게 썼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주의자 가운데 그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사람은 없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파월사령부의 베트남 여성 타이피스트들조차 이구동성으로 제일 존경하는 인물로 호찌민을 꼽을 정도였다.


  사고의 폭은 넓고 자유로웠으며 심지는 굳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 내 안에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신념으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한 가지는 박애주의 정신에 기반을 둔 자신의 굳은 신념이었다. 이런 말도 있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개조해야 한다. 우선 자신을 갈고 닦아야 그 다음에 조직 내부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가 중국 장개석 정부에 의해 첩자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 중이던 시기에 쓴 <옥중일기>에는 다행히도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인내하고 기다려왔다.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내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기를 배우며라는 시도 흥미롭게 읽었다. “마땅히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 하나로도 성공한다.” <옥중일기>를 통해 베트남인들이 그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한시로 남겨진 <옥중일기>는 문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베트남의 독립투쟁사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사료로 평가된다. 호찌민은 평생 170편의 한시를 남겼으며, <옥중일기> 속 시어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그의 강철 같은 의지와 애국정신은 모든 베트남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바딘 광장에는 붉은 베트남어 글씨로 위대한 호찌민 주석이여! 우리의 삶 속에 영원하시라!”라고 씌어 있다. 그의 고매한 인품이 그들에게 얼마나 친숙하게, 순수하게, 다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다가가 있는지를 이번 여행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권순진


Together We Fly - Darby De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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