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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신경림

향기로운 재스민 2017. 5. 13. 17:30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 시집『가난한 사랑 노래』(실천문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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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인께서 어떤 계기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솔직히 말하면 과거 어느 시민단체로 부터 '주문'을 받고 쓰신 '실천 강령'이나 격문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시대의 앞장에서 자신의 삶과 궤적이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란 신념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말씀이다. 거창한 뜻과 명분의 삶이 아닐지라도,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잘 새겨듣고 몇 가지 실천만 한다면 느슨한 일상에서 삶의 질을 개선하며 매순간 깨어있게 하는 각성제가 되리라. 우린 살아오면서 수없이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다짐했겠으나, '타성'이란 관성의 우군에게 발목 잡히고 제압당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겠나.


  이 시는 20세기 초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영역본 What is to be done?)를 환기케 한다. 19세기 중반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때 옥중에서 탈고한 한 편의 연애소설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회적 반향은 실로 엄청났다. 청년들에게 사랑과 혁명, 진보와 인간애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주었다. 당시 혁명을 꿈꾸던 청년 레닌도 이 소설을 읽고서 '그가 나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고백하면서 40년 뒤 같은 제목의 정치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볼세비키 혁명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숙지해야할 '혁명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로 인해 푸슈킨의 대위의 딸’, 고리키의 어머니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전의 문학이 공상적 이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는 구체적인 생활현장에서 어떻게 혁명을 이룰까를 이야기했다. 검열을 피해 은유와 완곡한 표현으로 쓰인 소설에서, 그는 위대한 진보 사상과 여성해방, 사회주의적 공동체, 혁명 후의 미래사회 등을 펼쳐 보였다. 수많은 청년과 지식인 그리고 혁명가와 사회개혁가들이 이 소설을 계기로 봉건적 굴레 속에서도 생산과 소비의 협동조합 운동, 민중과 함께하는 교육 공동체 운동 등에 나섰다. 이쯤 되면 문학은 그저 책 속에 갇힌 문학이 아니었다.


  체르니셰프스키도 문학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향도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의 내용은 시대와 장소,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는 보편적 주제인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을 구해준 남편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눈치 챈 남편은 아내를 위해 위장 자살까지 해가며 친구에게 아내를 양보하고, 아내는 새로운 남편과 새 삶을 꾸려간다는 줄거리다. 봉건사회의 억압적 상황에서 여주인공 파블로브나는 사랑을 찾아 나서고 급기야 사랑의 실현을 통해 개인의 삶의 의미를 완성하는데, 혁명의 가능성과 완성된 사회 혁명의 모습 또한 함께 실현한다.


  소설의 내용 가운데는 지금은 인류가 당연히 누리는 유급휴가나 장학제도 같은 복지제도의 모형도 제시되어있다. 이 책이 왜 그토록 열광적이었던가는 당시 짜르 체제의 억압과 농노제의 고름, 그리고 유럽 역사를 알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러시아의 변혁은 필연이었다. 지금은 폭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인해 공산주의가 쫄딱 망하고 이 책이 악마의 다른 이름으로 전락한 처지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에도 386세대 운동권의 바이블이 되었다. 따뜻한 진보정치인으로 사랑받는 심상정도 피가 끓었던 20대에 이 책의 많은 구절들을 통째로 줄줄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주인공이 방직공장에서 일한 이력도 그와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는 모두 개인적인 삶의 목표보다 당시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면하고자 했던 시대정신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열정적으로 미래를 개척해야할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이런 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사회를 먼저 봐야할 것이다.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린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날마다 진보하는 사람' 지금 또 다시 그렇게 샛바람에 떨지 않는 이가 소중한 세상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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