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엄원태

향기로운 재스민 2013. 8. 7. 08:30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엄원태

 

 

저물도록,
그녀는 일 마치고 나올 줄 모르고, 기다리는
사내 앞으로, 추억처럼 차들이 흘러갔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성냥개비를 길가의 도랑에다 휙,
던져 버린다. 시궁창이 잠깐, 비친 듯
그것을 찌르지 못하고, 성냥개비는 옆으로 눕는다
뜬 채 고정되어,

아까부터 조금 떨어진 미루나무 뒤에 숨어 있던
번들거리는 검은 고동색 반코트의, 딱딱한 표정을 가진 <헬멧>이
성능 좋은, 그러나 조금은 낡은 오토바이 옆에서
힐끗, 이쪽을 보았지만
다시 못 본 척, 가죽장화 발로 타이어를 툭, 차 본다

다시, 그는 담배가 다 탈 때까지 공장 담벼락에
기대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골목 입구의 가게에서 심부름 온 계집아이 하나
손에 담뱃갑과 동전을 들고 나오다가
화들짝, 놀란 듯 멈칫거렸으나, 이내 종종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참기 힘든 듯, 경찰은 신경질적으로 시동을 걸고는
산업도로 방향으로 황급히 사라져 버리고, 이윽고
사내 혼자 남는다, 키 큰 나무들이 더 높은 공중으로 떠오르고
발 밑의 잡초들은 수북이 부풀어 오른다, 시간은 그렇게
하염없이 늘어지기만 하고, 허기진 공복은
한 사발의 냉수처럼 쓸쓸하다

나무들은, 누렇게 뜬 잎을 버리지도 못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다, 형벌의 팔들을 가까스로 들고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피가 말라, 여윈 껍질만 비틀린 채
제 몸 하나 눕힐 자유마저 없이!

어쩌면 일생을, 그녀는
일 마치고 나올 줄 모르고, 기다리는
사내 앞으로, 추억처럼 차들이 흘러갔다


- 문학과지성사, 시집 <소읍에 대한 보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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