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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의 시 중에서....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1. 18. 07:50

 

 

주왕산에서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면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밤에 쓰는 편지 / 문학동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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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누이

 


57번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됏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우리집 삼남매는 딸, 아들, 딸 순서로 되어있고

각각 삼년 터울이라 중간인 아들, 민우는 위 아래로 다정하다.

큰딸과 막내는 육년이 차이나서인지 조금 덜 다정하다.

오누이 시처럼  '오빠, 여기 앉아'  '누나, 여기 앉아' 하면서 다정하다.

세월이 지나 각각 자기 짝을 만나더라도 지금처럼 서로 다정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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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別辭)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면 나는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인적 드문 소로길 스적스적 걸어
날이 저무는 일
비 오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으로 꼴똘히 서 있기도 하는 일


다 공부라고 하면 좀 낫지요마는

 

 

실천문학 / 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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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도ㅑ 형, 요새 삼마넌짜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도ㅑ 알었지 하고 노가다 이

아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

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

와 비닐 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

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

 

   좌간 우리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해야 혀 자슥들아 하며 용봉탕

집 장사장(51세)이 일단 애국가부터 불러제끼자, 하이고 우리집서

이렇게 훌륭한 노래 들어보기는 츰이네유 해쌓며 푼수 주모(50세)

가 빈 자리 남은 술까지 들고 와 연신 부어대는 봄밤이다.

 

   십이마넌인데 십마넌만 내세유, 해서 그래두 되까유 하며 지갑

들 뒤지다 결국 오마넌은 외상을 달아놓고, 그래도 딱 한 잔만 더,

하고 검지를 세워 흔들며 포장마차로 소매를 서로 끄는 봄밤이다.

 

   죽음마저 발갛게 열꽃이 피어

   강아무개 김아무개 오아무개는 먼저 떠났고

   차라리 저 남쪽 갯가 어디로 흘러가

   칠칠치 못한 목련같이 나도 시부적시부적 떨어나갔으면 싶은

 

   이래저래 한 오마넌은

   더 있어야 쓰겠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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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 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 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 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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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그대로 하여
저에게 이런 밤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비까지 내려 더 바삐 서두르고
우산이 없는 여학생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울상입니다.

팔다리가 없는 짐승들은 모두
어디로 총총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기
몇 안 남은 잎을 바람에 마저 맡기고
묵묵히 밤을 견디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빛바랜 머리칼로 찬 비 견디는
풀잎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하여
저에게 뜨거운 희망의 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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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가서 꽃이여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시집 ; 가만히 좋아하는 / 창작과비평,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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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저 길로 간다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도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리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움 울며 굴러서 간다


시집 ; 밤에 쓰는 편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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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몸이 있으나 몸을 부려둘 공간이 없다 그들에게는
소비할 공간이 없다 먹고 죽을 공간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발을 두나 머리를 두나 먹을 입과 담아둘 위장과 배설할
항문을 어디에 두나 똥은
또 어디에 내려놓나
모든 가능 공간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은
존재일 수 없음
그러므로 그들의 시간도 꽃필 수 없음 나프탈린처럼
또는 유령처럼 생으로 졸아들다가 증발한다
그러니 그들의 시간도 튀긴 구정물처럼 길가 담벼락이나
애꿎은 바지자락 같은 곳에 묻어 오갈들 뿐
그 떳떳하던 공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정말로
그 싱싱한 공간들을 다 먹어치운 것인가 소문처럼
그 착한 공간들을 어디에다 똥 눠 치운 것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에 그것을 한입에 물고 간 건 뉘 집 개?)
마이너스 공간에서 反物質을 소비하며 그들은 있다
아닌 공간의 그들을 긴 공간에서 보면
없다, 떼먹은 공간을 변제하고 그들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는 오직 게워냄에 있다 제 안을 밖으로
뒤집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운다 제 목구멍을 제 내장을 제 항문을 항문 바
깥의 우수마발 장삼이사를 돗진갯진을 피눈물을 살육을 마지막으로
게우는 제 입까지를 게운다
구강에서 항문까지 속통의 안팎이 홀딱 뒤집힌 채
그들은 있다, 있음인 체 해본다 한사코
그들은 별의 완성이자 죽음인 블랙홀이다 모든 공간은 몰수되고

우리는 그들의 내장 위에 붙어 있다
우리는 그들이 게워낸 공간 안에 다시 게워져 있다
우리는 그들의 항문을 지나 그 다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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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심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나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가을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가는 비


제50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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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꽃처럼 곱던 시절은 다 갔구나
까칠한 네 얼굴을 보니
지난 몇 해가 어제만 같다
다 그런 거라고 나는 능청을 떨지만
손쉽게 다 그럴 수는 없는 거였지

꽃같이 여리던 시절도 이제 다 가고
험한 세상 없이 살자면
튼튼한 몸뚱이 밖에 믿을 게 없다
오직 말할 것은
굳세거라 마누라야

저 세상 갈 때까지 한 솥밥 먹으며 부대껴 보자고
마른 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날
실없이 나는 눈물 난다
이 아름다운 약속이
기쁘기도 해서 섧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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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다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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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일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실은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의 누이라고도 하고
골방에서 평생을 난 앞 못 보던 외조부라고도 하지만
슬프고 옹색하게 생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다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그토록 먼 길을

현대문학 / 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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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곤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 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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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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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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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창

 

 

 사랑하기로 한다

 5분이 지나면

 마른풀과 짚으로 만든 잠자리로 돌아가

 혼자 눕기로 한다

 긴 침묵 끝에

 우리는 두 개의 강이 되기로 한다

 만나면 몸짓으로만 사랑하기로

 돌아가 먼 곳에 하나씩

 어린 물고기를 키우기로 한다

 

 

시가 있는 환한 세상 /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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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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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 바다에 묻다

 

 

눈 감고 내 눈 속 희디흰 바다를 보네
설핏 붉어진 낯이 자랑이었나 그대 알몸은
그리워 이가 갈리더라 하면 믿어는 줄거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하면 믿어는 줄거나
내 늙음 수줍어
아닌 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그댈 보느니
어쩔거나
그대 철없이 내 입안엔 신 살구내음만 가득하고
몸은 파계한 젊은 중 같아 신열이 오르니
그립다고 그립다고 몸써리치랴
오 빌어먹을, 나는 먼 곳에 마음에벗어두고 온 사내
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
상한 짐승처럼 속울음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


* 예래는 제주의 중문 동쪽 바닷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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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가만히 좋아하는 / 2006,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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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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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이성선(李聖善) 시인(1941―2001.5)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부분을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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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西歸)

 

 

날 잊지 말아라 노래 부르네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나 이승의 연(緣) 다하여
먼 길 가는 날
살쩍 고운 귀밑머리 흰 목덜미
그대 두고는 차마 못 가
자욱마다 소나기 오리
울고불고 몸부림치리

그래도 아마 나 시치미 떼리
시치미 떼고 휘파람 불리
한사코 무덤덤히 가서
한번도 뒤 안 돌아보리
머리털 한 오락 안 빠뜨리리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
별을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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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맞으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 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이다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 타고 놀러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제50회 현대문학수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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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으로
-90년식 1


비오고, 술은 오르고, 속은 메슥거려 식은 땀 배고, 비는 오는데, 어디 마른 땅 한귀퉁이 있다면
이 육신 벗어던졌으면 좋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은 자꾸 아련해지나, 양손에는 우산과 가방 하나
씩 쥐고, 자꾸 까부라지려 하네. 비는 오고, 오는데, 몸뚱이는 젖은 창호지처럼 척척 늘어지는데,
기억에도 희미한 옛벗들 그림자, 환등幻燈과도 같이, 가슴에 예리한 칼금 긋고 지나가네. 한 손
에 우산, 또 다른 손엔 내용불상內容不詳의 가방을 쥐고 필사적으로, 달리 마땅한 폼이 없으므
로 다만 필사적으로, 신발에 물은 스미고, 신호는 영영 안 바뀌는데.


제50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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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런지는 모르겠으나.


*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 가운데 한 구절. 이 시는 <너와집 한 채>로부터 운을 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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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왔나?


꿈인가, 무슨 이런 꿈이
저기 저 혈혈단신 죽음 같은 어둠
앞뒤로 지고
연꽃 하나,
오롯하게도 돌올하게도 아니고, 저기 그 왜
연꽃 하나 그냥 새하야니 떠오를 수도 있나
사랑이 왔나? (아이고 참, 한심도 해라)
그런데 저 백납빛 얼굴과 젖어 긴 머리채
익사한 심청인가 심청이 그이,
죽어서야 이제 돌아온 건가
저 죽음의 캄캄한 물 우흐로
물에 불은 연꽃 하나
칠순에 자식을 보다니
(아이고 참, 어쩌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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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을 보며
-청주의 도종환 형께


서울에서 보는 별은 흐리기만 합니다
술에 취해 들어와
그래도 흩어지는 정신 수습에
변변찮은 일감이나마 잡고 밤을 샙니다
눈은 때꾼하지만 머리는 맑아져 창 밖으로 나서면
새벽별 하나
저도 한 잠 못 붙인 피로한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서로 기다려온 사람처럼
말없이 마주 봅니다
살기에 지쳐 저는 많은 걸 잃었습니다
잃은 만큼 또 다른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대도 시골 그곳에서 저 별을 보며
고단한 얼굴 문지르고 계신지요

부질없을지라도
먼 데서 반짝이는 별은 눈물겹고
이 새벽에
별 하나가 그대와 나를 향해 깨어 있으니
우리 서 있는 곳 어디쯤이며
또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저 별을 보면 알 듯합니다
딴엔 알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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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시선 26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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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길
죽음 으로 닿는 길
피할 수 있다면
도리질치며 그러잡을 그 누구라도 있다면
저 길
내 지나간 발자국 바람 속에 흔적도 없을
참혹한 절망과 자유의 길
끝없는 잠 들어 꿈속으로도
그러나 피해 못 갈 길
차라리 이대로 죽음일 수 있다면
새 한 마리 해거름을 빗겨 나는데
내 몸부림의 길이만큼 뻗어 있는 길
피해 못 갈 저 헛된 갈증의 길

시집 ; 밤에 쓰는 편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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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다하다

 

 
풀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저 야윈 실핏줄들
빗방울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
완성된 실수여

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
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
잠시 사랑했던 이름들

이제 나에게 어떤 몸이 용납될 것인가
설움에 눌린 발바닥과 무릎뼈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시집  ;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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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한밤 졸리움 속에
그대마저 스러지고 나면 어쩌리

푸른 보리밭 지나
가느단 흙길 끝난 데 산 밑
홀태바지 가랑이도 땀에 젖고
깨진 옹기 조각들 햇빛에 날세우네

부황든 그대 참꽃 물 파란 입술 가리고
고개 돌리면 어쩌리

죽어가던 이들의 아득한 눈빛
지난 겨울 하얗게 잦아들던 눈들의 비명이 아직 생생한데
가서 또 가서
돌아 못오면 어쩌리 그대

시집 ; 밤에 쓴편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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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냥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한국일보 / 詩로 여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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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 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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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깼다.  눈 내리깐 채 몸의 제일 후미진 구

석에 엎드려 있는 그것은 백만년 인류사를 배경으로 갖

는 것이어서,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으로는 감히 어리댈 수도 없었다. 아프가니

스탄의 굶주림으로부터 정신대 끌려갔던 내 재당숙모에

이르는, 유구한 상치의 넋들이 그 숨죽인 다소곳함 속에

는 서려 있다고 보였다

 그래서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

은 아닌가 한순간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

 아아,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는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

는지 발을 조금 당기고 치맛자락을 끌어내려 슬며시 덮

고 마는 것이었다.

 

 

가만히 좋아하는 / 2006년 4월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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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永訣


산 이들 남아
흰옷 입고 절 올리니
하늘은 맑게도 개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한평생이 아득도 합니다
그 굽이굽이들 돌아
당신은 내 앞에 누워 계시고
살아남은 우리는 또 목숨 이어갈 궁리를 해야 합니다
많은 돈도 벌지 못했고
남부러운 벼슬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현고학생부군신위' 작은 위패가 초라해도 보입니마만
사느라고 살아왔습니다
아름답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영영 이별입니다
다시는 손도 잡아볼 수 없습니다
당신을 만나던 날 처음으로 큰절을 올렸지요
희끗한 머리 가다듬고
내 남은 것 모아
마지막 절을 올리오니
받으소서
이제 우리가 무엇으로 또 만나겠습니까
다시 만난들 또 어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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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보며


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 때
그러나 눈 있는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 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는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쓰림을 부둥켜 안고
가거라 속 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 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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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강을 보며


멀리서 보면 고요한데
가까이 다가가 속을 들여다보면
흐른다
돌에 이마를 부딪치며
오만 잡쓰레기들끼리 얼크러져
서로기대고 또 감싸안고
피 튀기며 거칠게
비켜서서 숨돌릴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깊은 설음은 더 깊이 다스리고
치받는 신명은 소용돌이쳐 푼다
간발의 틈도 없이
사정없이 부닥쳐
박살이 나면 다시 몸 추스려 더욱 세차게

삶의 이 진저리나는 격렬함
그러나 다시 멀리서 보면
한강은 백치같이 무심한 얼굴로
또 한번 우리를 갈긴다

시집 ; 밤에쓰는 편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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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누님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 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빈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이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찬 바람에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 들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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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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