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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2월 / 황지우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2. 16. 06:50

 

 

12월 /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家産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 시집『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미래사,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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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에서 느끼는 우리의 생각은 생활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겨울에 대한 감상도 빈부의 정도에 따라 제각각 제 느낌대로이다. 난방 잘된 포시라운 곳에서 할랑하게 일하며 넉넉한 월급을 받거나 오히려 겨울에 노가 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12월과 이를테면 추운 길거리에서 과일 리어카 행상을 하며 곱은 손으로 얼마 안 되는 구겨진 천 원짜리 지전을 주머니에서 꺼내 몇 번이고 세고 또 세는 사람이 느끼는 겨울 단상은 분명 다르다.

 

 이 겨울 마냥 행복에 겨울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이럴 때 자칫 도가 넘는 럭셔리풍의 겨울 찬가가 다른 등 굽은 이에게는 '악마의 트릴'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보너스를 안주머니에 챙겨 넣고서 스키장으로 바다 건너로 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2월에 상실감으로 번뇌가 더욱 깊어진 사람도 있다. 순수한 겨울서정을 느끼는 것까지 뭐라 할 순 없지만 신경질 나게 타인의 아픈 마음에 소금 뿌려대며 방방 나대는 일은 없기를 희망한다.

 

 그리 바쁠 것도 없는데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실속도 개념도 없이 한해를 살아온 것 같다. 12월도 반이나 지났다. 문득 허무가 밀물처럼 밀려오는데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이렇게 살아 존재한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절대강자'라고 과장된 유혹으로 작가 이외수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삶이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른 양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나는 나에게 무심한 채로 홀로 남겨지고 삶에 대한 흔들림도 여전하다.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나라 안팎의 정국은 수상하고 신산하기 짝이 없어 추위가 더 진하게 감각된다. 하지만 대저 삶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고 내 둘레의 생은 더욱 그럴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이라면서 '가난은 다만 불편할 뿐이고 사랑은 또 은유처럼 오거나 가는 것'이라 했던 김경주의 시가 가슴에 박힌다. 12월의 저녁거리를 걸으며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공연히 부화도 치민다.

 

 그래도 관공서 앞 12월의 나무에는 희망인지 현혹인지 모를 꼬마전구의 무리가 쉴 새 없이 반짝인다. 그리고 너무 눈이 부신 쇼윈도우는 그냥 지나친다. 12월의 다닥다닥 메모된 남은 날짜의 틈바구니에서 누군가는 잠을 설칠 것이고, 누군가는 술에 취해 길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어갈 것이며, 또 누군가는 기도로 밤을 지새울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해답은 없고 질문은 생경하기만 하다. 내일은 동네목욕탕에서 독소를 빼내고 묵은 때나 벗겨야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12월이 며칠 안 남은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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