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시인 이정록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했다. 2001년 김수영문학상과 2002년 김달진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도서로 시집 《아버지학교》《어머니학교》《정말》 《의자》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풋사과의 주름살》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산문집 《시인의 서랍》, 동화책 《십 원짜리 똥탑》, 동시집 《저 많이 컸죠》《콧구멍만 바쁘다》, 육필시집 《가슴이 시리다》가 있다.
* 이정록 시 몇 편
나뭇가지를 얻어 쓰려거든
먼저 미안하단 말 건네고 햇살 좋은 남쪽 가지를 얻어오너라 원추리꽃이 피기 전에 몸 추스를 수 있도록 마침 이별주를 마친 밑가지라면 좋으련만 진물 위에 흙 한 줌 문지르고 이끼옷도 입혀주고 도려낸 나무그늘, 네 그림자로 둥글게 기워보아라 남은 나무 밑동이 몽둥이가 되지 않도록 끌고 온 나뭇가지가 채찍이 되지 않도록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나무 한 그루
내 棺으로 쓰일 나무가 어딘가에서 크고 있다
한 그루 한 그루 뿌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산을 이루는가
하늘의 품은 하도 넓어서 나뭇잎 간혹 새처럼 치솟는다
밑가지를 버리고 순을 틔우는 나무 껍질에 딱딱한 벌레를 감사며 그늘을 내려놓는 나무는 내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경험한다
목숨을 걸어야 내 할 수 있는 일 나는 누구의 따뜻한 棺이 될 수 있을가
나를 집으로 삼을 벌레들아 여기 나이테만 촘촘한 괴목이 있다
내 棺으로 쓰일 나무 한 그루 어딘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
더딘 사랑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보석달
식 올린 지 이년 삼 개월 만에 결혼 패물을 판다 내 반지와 아내의 알반지 하나는 돈이 되지 않아 남기기로 한다 다행이다 이놈들마저 순금으로 장만했다면 흔적은 간데없고 추억만으로 서글플 텐데 외출해도 이제 집 걱정 덜 되겠다며 아내는 부재와 평온을 혼돈하는 척, 나를 위로한다
농협빚 내어 장만해준 패물들 빨간 비단상자에서 꺼내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양파껍질인 양 신문지에 둘둘 만다 버려야 할 쓰레기처럼 밀쳐놓고 화장을 한다 거울에 비친 허름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월급날이면 자장면을 먹고 싶다던 그때처럼 화장시간이 길다 동창생을 만나러 나갈 때처럼 오늘의 화장은 서툴러 자꾸 지우곤 한다
김칫거리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길 자전거 꽁무니에 걸터앉아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콧노래 부르며 노을이 이쁘단다 금 판 돈 떼어 섭섭해 새로 산 알반지 하나를 쓰다듬으며 아내는 괜히 샀다고 괜히 샀다고 젖은 눈망울을 별빛에 씻는다 오래 한 화장이 지워지면서 아내가 보석달로 떠오른다
서시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물뿌리개 파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렇듯 묵직해져야겠다고. 좀 흘러넘쳐도 좋겠다고.
지친 꽃나무에 흠뻑 물을 주며 마음먹는다. 시나브로 가벼워져야겠다고. 텅 비어도 괜찮겠다고.
물뿌리개 젖은 통에 다시금 물을 받으며 끄덕인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고개 숙여 인사해야겠다고.
하지만, 한겨울 물뿌리개는 얼음 일가에 갇혔다.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주뼛주뼛 출렁대기만 한 증거다.
얼음덩이 웅크린 채 어금니목탁이나 두드리리라. 꼭지에 낀 얼음 뼈, 가장 늦게 녹으리라.
나이
- 어머니학교 2
나이 따질 때, 왜
만 몇 살이라고 하는 지 아냐?
누구나 어미 뱃속에서 만 년씩 머물다 나오기 때문이여.
어린 싹이나 갓난 것 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이 접히지 안 튼?
우주정거장에서 만 살씩 잡수시고 나온 분들이라 그런 겨.
그러니께 갓난아기가 아니라, 갓난할배 갓난할매인 겨.
늙고 쭈그러져, 다음 정거장이 가까워오면
아기들한테 턱수염 잡히고 지팡이 뺏겨도
합죽합죽 매화꽃이 터지지. 봄은 말이다,
늙은이들 입가 주름골에서 시작되는 겨.
원고료
- 어머니학교 11
요샌 글이 통 안 되냐? 먼저 달에는 전기 끊는다더니 요번 달에는 전화 자른다더라. 원고료 통장으로 자동이체 했다더니 며느리한테 들켰냐? 글 써달란 데가 아예 없냐? 글삯 제대로 쳐줄 테니까 어미한테 다달이 편질 부치든지. 글세를 통 당 주랴? 글자 수로 셈해 주랴?
물
- 어머니학교 12
티브이 잘 나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 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 놓으면 안 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다가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겄다. 뭐가 그리 슬퍼서 울어쌓는다니? 남의 집 것도 그런다니?
엄니의 화법
추석 맞아 장발에 파마하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너는 농사도 안 짓는 애가 왜 검불은 이고 댕기냐? 하신다
글도 안되고 이리저리 마음 시려서 몇달 만에 머리 깎고 다시 찾았더니,
나라 경제가 어렵다 하드만, 그새 농사채 다 팔아먹었냐? 하신다
넉 달 전 말씀 어찌 기억하고 바깥쪽 댓구를 단다 배냇짓부터 가르쳐준 엄니와 말싸움 해봐야 뭐하냐? 선산 쪽에다 혼잣말 던진다
엄니가 내 땅 훑어갔구먼 머리칼에 불두화 수북한 거 보니께
뽑지도 않은 배추밭에 함박눈 내린다 하느님도 농사채 다 팔아잡쉈나? 그득그득 내려앉는 하늘 검불들
사내 가슴
아버지학교 1
아들아, 저 백만 평 예당저수지 얼음판 좀 봐라. 참 판판하지? 근데 말이다. 저 용갈이* 얼음장을 쩍 갈라서 뒤집어보면, 술지게미에 취한 황소가 삐뚤빼뚤 갈아엎은 비탈밭처럼 우둘투둘하니 곡절이 많다. 그게 사내 가슴이란 거다. 울뚝불뚝한 게 나쁜 것이 아녀.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그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출렁대니까 숨쉬기 수월하고 물결가락 좋고, 겨우내 얼마나 든든하겄냐? 애비가 부르르 성질부리는 거, 그게 다 엄니나 니들 숨 쉬라고 그러는 겨. 장작불도 불길 한번 솟구칠 때마다 몸이 터지지. 쩌렁쩌렁 소리 한번 질러봐라. 너도 백만 평 사내 아니냐?
* 용갈이: 용이 밭을 간 것과 같다는 뜻으로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져 생긴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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