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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시인을 찾다가...

향기로운 재스민 2014. 1. 29. 13:39

 
앵두꽃을 찾아서 / 박정대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들으며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앵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꽃을 보기에 그대만한 장소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이제사 고요히 철들어 나, 앵두꽃을 보러 그대에게로 가노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실은 없고 그 사실 앞에서 앵두꽃이 피지 않는 곳 또한 없음에랴


 

 

그대의 발명 / 박정대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하얀 돛배 / 박정대

 

 

 창밖엔 눈이 내렸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 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 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 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 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또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 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 눈은 진눈깨비가 되어 퍼붓다가, 멎고, 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 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 삶의 공터 위로.....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사곶 해안 /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 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목소리처럼 이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네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2004년 5월 제19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桶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사진 - <구상나무> 님의 블로그에서

 

 


馬頭琴 켜는 밤 /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의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정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마두금-악기의 끝을 말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제 14회 김달진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등려군 / 박정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나무 아래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무슨 시를 쓰지, 잠시 고민하다 등려군이라는 제목을 써보았을 뿐이다


 깊은 밤에, 뜻도 알 수 없는 중국 음악이 흐른다, 나 지금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


 모니엔 모 위에 디 모 이티엔
 지우 씨앙 이 장 포쑤이 더 리엔
 난이 카우커우 슈어 짜이 찌엔
 지우 랑 이치에 저우 위엔
 쩌 부스 찌엔 롱이 디 쓰
 워먼 취에 떠우 메이여우 쿠치
 랑타 딴딴 디 라이랑타 하오하오 더 취 따오 루찐
 니엔 푸 이 니엔
 워 부 넝 팅즈 화이니엔
 화이니엔 니화이니엔 총 치엔 딴 위엔 나
 하이펑 짜이 치 즈웨이 나 랑화 디 셔우치아 쓰 니 디 원러우
그렇다면 지금 그대들이 읽고 있는 이것은 노래인가 시인가, 등려군이 부르는 노래인가 내가 쓰는 등려군에 관한 시인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려군의 노래나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깊은 밤에, 시란 그런 것이다


시와사상 2003년 가을호

 

 


추억도 없는 길 / 박정대

 

 

하늘은 신문의 사설처럼 어두워져 갔다
주점의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고
구름은 저녁의 문턱에서 노을빛으로 취해갔다
바람은 한 떼의 행인들을 몰아 욕정의
문틈으로 쑤셔 넣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수한 욕망으로의 이동이라고 그날 저녁의
이상한 공기가 나의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술을 마시고 청춘을 탕진해도
온통 갈망으로 빛나는 가슴의 비밀, 거리
거리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세월의 화석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막무가내로 나의 기억을 흔든다
검은 표지의 책, 나는 세월을 너무 오래
들고 다녔다 여행자의 가방은 이제 너무 낡아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흠칫 놀라곤 하지만
세월에 점령당한 나의 기억을 찾으러
둥그런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며 저녁의 나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간판들은 화려하고도 허황하구나
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
추억도 없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버찌 / 박정대

 

 

허공의 경계선을 지나
운석처럼 버찌들이 떨어진다
저들이 태어나 한 생애를 견디고
끝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한 점 핏방울로 맺히는
망명점. 북반구의 유월
 

기억나지 않은 생애(生涯)


저 너머로,
지가 그 무슨
열혈남이라도 되는 양
핏빛으로 버찌가 떨어진다
 

이해받지 못한
울음덩어리의 生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박정대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에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고요히 촛불을 밝히는 시간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서
촛불을 켜 들고, 그래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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