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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를 읽는다/ 박완서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 23. 06:12

 

 

 

시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박완서 산문집『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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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 연재될 당시 아침에 그것을 받아 읽을 때의 행복감이 생각나서 얼른 샀다는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애송시 100편(정끝별, 문태준 해설)'을 두고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두 권의 책은 살 때도 행복했지만, 다시 읽어도, 아무데나 읽어도 내 정신은 조금은 깊고 높아지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본다.’ ‘멋모르고 그냥 느낌으로 좋아하던 난해한 시에 뛰어난 시인들의 웅숭깊고 친절한 해설이 붙은 것도 금상첨화였다.’면서 책상 가까이 눈에 잘 띄고 손만 뻗으면 수시로 뽑아볼 수 있는 자리는 시집들 차지라고 하셨다.

 

 박완서 선생의 시사랑은 문학소녀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애송시 100편'에 실린 시들을 신문연재 전에 거의 다 읽었고, 암송할 수 있는 시만도 100편 가까울 정도로 선생의 시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이런 담백한 진술이 담긴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등단 40년을 맞아 선생이 작고하기 1년 전에 펴낸 선생의 마지막 저서였다. 표제산문의 마지막 문장은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선생의 말씀처럼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여유로 가시는 길 아늑하고 편안한 자연과의 교감이었으리라. 하지만 4년 전 1월 22일 선생의 갑작스런 부음은 안타깝고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한국문학의 지분이 크게 줄고 한 축이 스르르 헐려나간 느낌이었다.

 

 현기영 선생은 <오래된 농담>을 읽고 ‘연로함이 이토록 총명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고갈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충만해진 이 영혼의 샘물이라니, 참으로 놀라울 일이다’라고 했다. 신경숙은 ‘정곡을 찌르며 생의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들춰내 보일 때면 글귀신을 본 듯하여 몸과 마음이 소름 돋는다’며 우리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대변하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는 이야기도 선생의 수중에 들어가면 ‘쫀득하기 이를 데 없는 진경’을 이룬다. 그래서 ‘세상의 시시한 이야기들은 선생이 계셨기에 행복했을 것’이다.

 

 선생이 떠난지 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박완서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소설은 물론이고 이렇듯 시를 사랑하는 향훈하며 맑은 웃음, 특유의 따쓰하고 진솔한 산문까지 공감과 감동을 얻고 있다. 어제 선생의 기일에 맞춰 <문학동네>에서 산문집 7권을 왕창 묶어낸 것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키 위함일 것이다. '쑥스러운 고백' '나의 만년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살아 있는 날의 소망'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각권에 붙은 제목들이다. 구미가 돋지만 당장 책을 사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도 글을 쓰다가 막히면 서가 안쪽에 꽂힌 선생의 책들에서 슬쩍 그 유려한 감수성을 훔쳐올지는 모르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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