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1

한숨의 크기/이정록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1. 16. 20:01

 

 

 

 

 

몸과 맘을 다

   

장독 뚜껑 열 때마다

항아리 속 묵은 시간에다 인사하지.

된장 고추장이 얼마나 제맛에 골똘한지

손가락 찔러 맛보지 않고는 못 배기지.

술 항아리 본 적 있을 거다.

서로 응원하느라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입술들.

장맛 술맛도 그렇게 있는 힘 다해 저를 만들어 가는데,

글 쓰고 애들 가르치는 사람은 말해 뭣 하것냐?

그저 몸과 맘을 다 쏟아야 한다.

무른 속살 파먹는 복숭아벌레처럼

턱만 주억거리지 말고.

   

   

   

   

돼지 집에 돼지만 살데?

병아리도 들락거리고 참새도 짹짹거리고.

본시 내 집이란 게 어디 있냐?

은행에 꼬박꼬박 월세 내며 사는

집 있는 사람들, 부러워할 것 없다.

외양간에 황소만 누워 있데?

강아지도 놀고 암탉도 꼬꼬댁거리고.

사람만 집을 대물림하지.

까치며 말벌이며 새들 봐라.

집은 버리는 거라고, 옛날에

글방 훈장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라.

그런 한자漢字가 있다고.

한문 선생인께 알 거 아니냐?

모르면 옥편 찾아보고.

   

   

   

그믐달

   

가로등 밑 들깨는

올해도 쭉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거지.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지나고 봐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한숨의 크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냇물 흐린다지만,

그 미꾸라지를 억수로 키우면 돈다발이 되는 법이여.

근심이니 상심이니 하는 것도 한두 가지일 때는 흙탕물이 일지만

이런 게 인생이다 다잡으면, 마음 어둑어둑해지는 게 편해야.

한숨도 힘 있을 때 푹푹 내뱉어라.

한숨의 크기가 마음이란 거여.

   

   

   

실패

   

실타래 뭉치하고

백옥 실패 하나씩 갖고 태어나지.

그 실마릴 놓치지 않으려고

빈주먹 옹송그리고 탯줄 벌겋게 우는 겨.

엉키고 꼬이는 실마릴 요모조모 풀다 보면

그 끝자락에 무슨 값나가는 옥패가 나올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실마리 푸는 재미지.

뭔 횡재하려고 욕심부리면 안 되는 겨.

뭔가 나오겄지 언젠간 나오겄지 하고 견디는 거여.

실 꾸러미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실속 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게 그중 실속 있는 겨.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너 한 번 더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는 겨.

   

   

 

2015.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