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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시 모음 (김재진의 '풀' 외)

향기로운 재스민 2016. 3. 1. 07:45

상처 시 모음> 김재진의 '풀' 외

+ 풀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김재진·시인, 1955-)


+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시인, 1929-)


+ 상처가 그늘을 만든다

나무는 상처받아도
속 끓이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다
누군가 칼을 내리쳐 팔을 잘라도
나무는 울지 않는다

품이 넓은 나무일수록
그늘이 기인 나무일수록
수많은 상처의 자국
마치 곰보 같지만
그 상처의 힘으로
새 가지를 뻗어
넓고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강경호·시인, 1958-)


+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사람 모여 사는 곳 큰 나무는
모두 상처가 있었다
흠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오후내 저녁내
몸 속에서 진 흘러나와
찐득찐득 그곳을 덮어도 덮어도
아직 채 감싸지 못하고 쑤시는구나
가만,
내 아들 나이 또래 후배 시인 랭보와 만나
잠시 말 나눠보자
흠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황동규·시인, 1938-)


+ 상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
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
비틀대며 가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 입은 자는 알 것이다
상처 입은 타인에게 다가가
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주고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상처입힌 자들을 향해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
상처 핥아주는 모습을
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이승하·시인, 1960-)


+ 사랑의 상처

세상 모든 것이
지난다 해도
지나가지 못하고
남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상처는
헛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너만은 영원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대 마음을 다한
사랑이었다면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상처는 다시
사랑을 남기고

비록
되돌아오지 않는
관심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다시 어디선가
생명을 틔워 내리니

사랑의 상처는
헛됨이 없어
아름다운 끝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홍수희·시인)


+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

고추밭에 고춧대들이 다 쓰러졌다
홀로 비바람 견디기에 힘들었던가
아니라면 그 어떤 전율 같은 격한 분노에
몸을 온통 내던졌는가

내 기억의 뒤란에 쓰러져 누운 것들이 있지
오래 묵었으나 삭지 않아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지

작년 여름 쓰러져 죽은
미루나무가지들을 잘라 지주대로 삼는다
껴안는구나
상처가 상처를 돌보는구나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과 엮이며 세워져
한몸으로 일어선다
그렇지 그렇지
푸른 바람이 잎새들을 어루만지는구나
(박남준·시인, 1957-)


+ 상처의 문장

지난 태풍에 마당의 벚나무가 쓰러졌다
은현리에 뿌리 내린 지 10년 된 벚나무였는데
큰바람 제 몸 제 뿌리로는 견디기 힘들었나보다
그래서 나무를 다시 세워주었는데
세워주고 마음 다주며 보살폈는데
나무의 몸. 몸의 가지에 껍질이 터진다
저 할복하는 것 같은 나무의 후유증을 보며
나무가 제 몸으로 쓰는 상처의 문장을 읽는다
쓰러져 본 사람은 알지
제 상처의 피에 펜을 찍어 쓰는 문장이 있다는 걸
그 문장 어떤 눈물로도 지울 수 없다는 걸
(정일근·시인, 1958-)


+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
                  
상처를 입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상처를 내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 사람은
끝없이 많은 고통을 당해도 강해진 채
고통에서 걸어 나온다.

자기를 스스로 배반하는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아무도 그를 반대하지 않아도
그는 무너져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비록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내고 부당하게 다룰지라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깨어 있고 분별력을 갖도록 하자!

그리고 모든 씁쓸한 일을
고귀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어내자!
(성 요한 크리소스톰·초대 교부, 347-407)


+ 마음의 상처

몸의 상처는
세월 가면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앙금같이 오래 남는다

잊을 만하다가도
한순간 덧난다.

네 맘 아프게 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겸손히 용서를 구하는
그 한마디면

깨끗이 나을  
마음의 상처들 수두룩하다.

너나없이
가엾은 사람들인데  

한시바삐 용서를 구하고
너그럽게 용서하며

그런 상처들
말끔히 없애고 싶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2016.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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