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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자란다 & 외/최문자

향기로운 재스민 2016. 3. 8. 12:50

1>-눈물도 자란다/최문자-​

 

눈물도 자란다.
거짓말처럼 정말 자란다.
속맘 푹푹 파먹고도 빼빼 마르면서 자란다.
눈물 자랄 때는 이상하게 눈물 없어지면서 자란다.
바짝 마른 순결로 뱉을 것도 없이 자란다.
죄 같은 성장
태초에 능금을 파먹고 이브의 눈물도 이렇게 자랐지.


 

<2>-벽과의 동침/최문자-

  

  이십 년 넘게 벽 같은 남자와 살았다. 어둡고 딱딱한 벽을 위태롭게

쾅쾅 쳐 왔다. 벽을 치면 소리 대신 피가 났다. 피가 날 적마다 벽은

멈추지 않고 더 벽이 되었다. 커튼을 쳐도 벽은 커튼 속에서도 자랐다.

깊은 밤, 책과 놀다 쓰러진 잠에서 언뜻 깨보면 나는 벽과 뒤엉켜

있었다. 어느새 벽 속을 파고 내가 대못처럼 들어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숨도 벽 속에서 막혔다.

 

 요즘 밤마다 내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우수수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

가 들린다. 벽의 영혼이 마르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벽을

때릴 수 없는 예감이 든다. 나는 벽의 폐허였다. 그 벽에 머리를 오래

처박고 식은땀 흘리는 나는 녹슨 대못이었다.


 

 

<3>-공회전/최문자-

 

 사랑이 미끄러운줄
나는 안다.
속도제한 없는 아우토반 free-way
그 곳을 나는 안다.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달릴 때
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수막 같은
눈물현상을
바퀴가 혼비백산 하던 그 황홀을
팽팽한 그 차로에서 나와
어지로운 허리띠를 풀때야
나는 알았다.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는 쓸쓸함에다
징그런 수술자국 하나 긋고
어디를 건드려도
눈물 차오르던 고속주행의 후유증
그 후로
자주 멈추는 자동차를 위하여
동맥까지 우울하게 떨려오는 시동을 미리 건다.
쓸쓸한 바퀴의 노동 끝에 묻었다가
지상으로 떨어지는 진흙빛 허무를 내려다보며
사랑만 닳아지는 공회전을 한다.
헛바퀴가 돌아갈 적마다
헛소리를 지르다 제자리에 기절해버리는
그런 아픈 바퀴를
나는 네개씩이나 달고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4>-땅에다 쓴 시/최문자-

 

 

나는 땅바닥에 대고 시를 썼다.
돌짝도 흙덩이도 부서진 사금파리도
그대로 찍혀 나오는
웅툴불퉁했던 내 것들.
삐뚤삐뚤 한글 자모가 나가고
미어진 종이 위에서
연필은 몇 자 못 쓰고 늘 부러졌다.
시에서 지금지금 흙 부스러기가 씹혔다.
죽었던 네 부스러기들이 씹혔다.

 

더 이상 세상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땅바닥에 와 있었다.
죽은 꽃잎에 대고
죽은 사과 알에 대고
죽은 새의 눈언저리에 대고
꾹꾹 눌러썼다.

 

우드득우드득
무릎 관절 맞추며 붙이며
죽은 것들이 일어섰다.
지금도 흙바닥에 대고 시를 쓴다.
죽음도 사랑도 절망도 솟구치며 찍혀 나오는
미어지는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다.
몇 자 못쓰고 부러지는 연필 끝에
침 대신 두근거리는 피를 바른다.
시에서 늘 비린내가 풍겼다.


 

 

<5>-외출/최문자-

 

 

시인이 생선을 고른다
값을 물어보기 전에

 

깊은 바다에 얼마나 드나들었나?
아가미를 열어본다

 

바다에서 나와 땅에서 떠돌기 얼마나 쓸쓸했나?
지느러미 힘줄을 들쳐본다

 

정말 바다의 자식인지
등짝에서 파도에게 매맞은
푸른 멍자국을 찾아본다

 

얼마나 바다를 토해내야 죽을 수 있었나?
핏발 선 눈알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뻐끔거리던 입마다 바다가 몰려있는데
와르르 와르르 파도가 몰려와 좌판을 때리고 가는데
싸요, 싸
단 돈 오천 원에 싱싱한 주검이 두 마리
수산시장 비린내만 묻히고 그냥 돌아온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겨울 바다
노량진 역에서 같이 지하철을 탄다


 

<6>-눈물/최문자-

 

 

어릴 적 외할머니가 이불 빨래하는 날은
뒷마당에서 잿물을 내렸다
금이 간 헌 시루 밑에서 뚝뚝 떨어진
재의 신음소리
꼭 독한 년 눈물이네
열 아홉에 혼자된 외할머니 독한 잿물에
덮고 자던 유년의 얼룩들은 한없이 환해지면서
뒷마당 가득 흰 빨래로 펄럭였다
하나님은 내가 재가 되기를 기다렸다
하루종일 재가 되고 났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뭐가 있을까? 하여
쇠꼬챙이로 뒤적거리며 나를 파보고 있었을 때
재도 눈물을 흘렸다
어제의 재에다
새로 재가 될 오늘까지 얹고
독한 잿물을 흘렸다
조금도 적시기 싫었던 사랑까지
한없이 하얘져서
세상 뒷마당에 허옇게 널려 있다
재는 가끔 꿈틀거렸다
독한 눈물을 닦기 위하여


 

 

<7>-꽃구경/최문자-

 

 

모두들
나무에 걸려있는 환한 꽃만 바라보는데
나는
땅에 떨어져 죽은 꽃들을 보았다.
믿는 것들이 다 그러하듯
찍찍 찢어진 꽃잎들
어지럼증 끝내고 숨 끊겨 뒹굴었다.
어쩌자고 약속도 없이 손을 놓고
바람에 줄줄이 끌려가 죽었을까?
떨어지기 전
세상에 걸린 날개 잡아당기느라
얼마나 뿌드득거렸을까?
봄날, 허무가 출렁거린다.
꺼지고 꺼지는 꽃잎들. 사람들.
알을 낳고 싶은 칼새처럼
허공에 떠있던 꽃들의 삶이 땅으로 내려온다.
이제 그만 바닥에 닿기 위하여
모두들
아직 나무에 걸려 푸드득거리는 꽃만 구경하는데
나는 바닥을 본다.
칼새가 떨어뜨린 비린 알들을 본다  


 

<8>-뿔 2-뿔 달린 여자/최문자-

 

 

다들
개뿔도 없으면서
뿔따구 나게 하던 날은
나는 양쪽 이마를 만져보았다.
개뿔이라도 남아서 나는 좋았다.
개뿔마저 뽑힌다면
이 허망을 걸칠 곳이 어디였겠나?

 

아직 모근이 싱싱한 뿔을
꽃처럼 감추고 있다.
컹컹컹 짖을 날을 위하여.


 

 

<9>-고백/최문자-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10>-칼을 쓰는 밤/최문자-

 

 

늑대가 그리운 날도 있다
그런 밤은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에서 칼을 꺼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면
시퍼런 칼 하나 쥐어주시던 하나님
무쇠 같은 하나님
무릎까지 쑥쑥 올라온 세상의 순무밭에
위험한 칼 하나 들려
순무처럼 세워놓고
감춰둔 늑대 몇 마리 이젠 내놓으라고
가만가만 해온 젓가락질까지
짐승과 섞던 눈길까지
스치다 잡힌 마음까지
목책 너머로 건너다보신다.


순무 뽑을 때쯤 해서
순무밭 무청은
달빛 타고 더욱 괴괴하게 푸르고
숨어 있던 늑대
참다못해 목책을 훌쩍 넘을 때
어쩔 수 없어
수없이 칼을 꺼내는 밤
늑대들은 종소리처럼 흩어졌다.
칼 없는 자를 찾아서
잎새와 뿌리가 뎅겅뎅겅 잘린 채
설레임이 끝난 순무밭.
어지러운 늑대 발자국 위에
눈물 같은 이슬만 내리고 


 

<11>-실명/최문자-

 

 

흠집이 많은 과일이 좋았다
열망할 적마다 찌부러진 그 자리가
흉할수록 좋았다
한사코, 불구의 반점으로 남고 싶은
위험한 사상은
가을을 기다려 오히려 흉터가 되었다
흠집이 많은 과일일수록 좋았다
용서할 수 없어 한없이 헛구역질하던
그 자리가 좋았다
아플 것 다 아파본 것들
실상은 눈이었다
밖으로 흉하게 자란 눈이었다
꿈꾸고 있다가 실명된 눈이었다
감긴 눈이 많은 과일이
나는 좋았다
꼭 감고 흘린
그 어두운 눈물 자국이
더 없이 좋았다


 

 

<12>-믿음에 대하여/최문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피가 날 때까지 믿는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한 남자가 잘라온 다발 꽃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난 뻐꾸기 시계가 4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 귀 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는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13>-못의 행방/최문자-

 

 

새벽 1시

 

푸른 잎사귀 무성한

나무 십자가를 메고

어디 가서 한번 못 박히고 싶은 이 밤

철거덕

철거덕

누군가를 못 박고 싶은

굵은 무쇠 못들이 서쪽 산을 넘어온다

용케 알아보고 찾아온다

내 손바닥을


 

<14>-출간 이후/최문자-

 

 

쌀독 어렵게 들어내고 나니

내 헛간에

의식을 파다 그만둔

흙 묻은 곡괭이 자루 나뒹굴고

날 갈다 만 녹슨 낫,

흔해빠진 기역자 언어로 꽂혀 있네

바람 일자 지푸라기 풀풀 날리는

플러그 뺀

어두운 헛간

언뜻언뜻 보이는 흘린 쌀알 몇 개

 

아무 볼 일도 없는데

지하철 4호선 회현역

가파른 계단을 휘청휘청 내려가고 있네

 

 

<<최문자 시인 약력>>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박사.

*시집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  『사과 사이사이 새』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등.

*그밖의 저서 『시창작 이론과 실제』『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사상의 상징적 해석』등 다수..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및 제6대 협성대학교 총장 역임.

*2008년 제3

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2009년 제1회 한송문학상 수상.

 

2016. 03. 08  *한국시인협회상 수상자를 찾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