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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시모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6. 5. 14. 07:19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비극적 상상력], [문학, 인공정원] 소설  [낯선 별에서의 청춘], [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세도나 가는 길]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창작 강의,질마재 문학상 수상,   

 

 

연하계곡

 

 

충주 제천 지나자

들의 평등이 급격히 무너지며

척추 세우고 일어선 산세山勢가 사나워진다.

죽기 위해 먼 곳 가는 사람과

살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나는 철새들이

하늘과 땅에서 엇갈린다.

영월 늦은 저녁 밥때

여윈 불빛 몇 점

저문 길을 전송하는데,

저녁빛 속으로 내륙의 길들은 침전沈澱한다.

낭떠러지를 매달고 오르는 오르막차로 끝 지점

열린 허공에 입동 하늘은 퍼렇다.

먼 것은 멀리 있다는 까닭만으로

푸른 멍들을 몇 개씩 갖고 있다.

 

청령포와 장릉을 일별 한 뒤

연하계곡 방향으로 빠지는데,

찬 물길 키우는 계곡의 처지가

첩실 소생의 옹색한 살림 형편보다 낫다 못하리라.

에움길 두엇 새끼처럼 끼고 도는 연하계곡

그늘 내려 깊은 곳,

휘돌고 감돌아 나가는 저 물길에 가 닿는

마음속을 저미며 돌아오는

그릇과 숟가락 부딪는 소리가 캄캄하다.

 

연하계곡에 와서 계곡 바람소리를 듣는

내 귀도 푸른 멍이 든다.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앵두

 

 

오동나무 속의 어머니가 나와

사금砂金 한 웅큼을 건네주며

얘야, 소금 좀 다오, 소금 좀 다오, 했다.

벼랑을 품고 사는 나날,

앵두가 잘 익었어요, 라고 말하는 찰나

전나무에 얹혀 있던 작년의 눈이

잔모래처럼 날아와 이마를 때렸다.

얘야, 앵두가 잘 익으면 뭘 하니?

내겐 받을 손이 없구나.

 

두견새는 울지 말았어야 했다.

구름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누이들은 아직 피가 견고하지 않으니

어머니는 밤새껏 피울음 울다가 돌아갔다.

 

이튿날 앵두나무 가지를 보니

어린 누이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2005)에서

 

 

수그리다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 속으로

울음이 뭉툭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들 속에서

무릎 아래 그림자 키우는

누군가의 재개봉영화 같은 생이 밀려간다.

 

누군가 어둠 쪽으로 몸 돌려

꽃피는 머리를 수그린다.

 

 

가을病

 

 

아우는 하릴없이 핏발선 눈으로

거리를 떠돌았다. 누이는

몸 버리고 돌아와 구석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오, 아버지는 어둠 속에

헛기침 두어 개를 감추며 서 계셨다.

 

나는 저문 바다를 적막히 떠돌았다.

검은 파도는 섬기슭을 울며 울며

휘돌아 사납게 흰 이빨을 세우고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절망은 단단했다.

 

너무 오래 되어서 낡은 이 세상

가을해 떨어져 저문 날의 바람 속으로

마른 들풀 한 잎이 지고 어둠이 오고

나는 얼굴 가득히 범람하는 속울음 참았다.

 

살 부비며 살아온 정든 공기와

친밀했던 집 구석구석의 생김생김

아우와 누이와 아버지가

작은 불빛 몇 개로 떠올라

바람에 하염없이 쓸리는 것을 보았다.

 

오, 그때 세상에는 좁혀지지 않은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을 저문 바다의 섬과 섬 사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어둠과 바람과 파도뿐임을 알았다.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지켰어야 할 약속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그리운 나라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落果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3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 빠른 생쥐들은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진다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최후의 시장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으리라

너도밤나무 과의 북가시나무 숲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진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彼岸橋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검은 오버

 

 

검은 오버를 입고 산책길에 나선다

골목을 빠져 나오며

나는 검은 오버가 무겁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의 죄가 아니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가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 속에 수천 평의 추억들이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는 번개다

검은 오버는 빈 들판이다

검은 오버는 컹컹 짖는 밤의 개다

검은 오버는 진눈깨비 내려치는 길이다

검은 오버는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던

청춘의 한때

증오의 대상이던 아버지다

이제는 온갖 병치레를 하며 졸아든 아버지다

검은 오버에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이 들어 있다

검은 오버에서는 건초 냄새가 난다

검은 오버에는 죽은 자들의 다문 입이 숨어 있다

 

젊은 아버지는 검은 오버를 자주 입었다, 늦은 밤에

귀가하는 아버지의 검은 오버의 어깨에는

별들이 함부로 묻어 있곤 했다, 아버지는

검은 오버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르기를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검은 오버의 교훈을 가슴에 새겨라,

검은 오버는 네 인생에 유익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검은 오버가 싫다

검은 오버는 너무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누른다

 

세월이 흘러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검은 오버를 입는다

검은 오버 양쪽에 달려 있는 호주머니는

슬픔의 모태다, 산책길 내내 내 손은

검은 오버 호주머니 속에 얌전히 들어가 있다

 

하늘의 회랑에 말없이 걸려 있는 검은 오버,

나는 구름으로 지어 만든

검은 오버를 입는다

 

 

잘못 배달된 화물

 

 

때때로 인생이란 잘못 배달된 화물

몸이란 봉인된 화물

 

내 몸 속에 펼쳐지지 않은 한 권의 책

내 몸 속에 알 낳는 비둘기 암컷 한 마리

내 몸 속에 종유석이 자라나는 동굴

내 몸 속에 날개 달린 뱀 쌍둥이

내 몸 속에 눈이 퇴화한 동굴 박쥐떼

 

태어나자마자 늑대 새끼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거북처럼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고

앵무새처럼 종알거렸고

몸 속에 온통 독한 회의와 의문들이

나쁜 암종처럼 출렁거리는 청춘이 왔을 때

나는 비에 젖어 헤매 다녔다

때로 운 나쁜 화물들은

비에 젖은 채 배달되는 법이다

 

꽃피어나지 못한 채

나는 쓴다

돌에 문자를 새겨 넣듯 고통으로 쓴다

인생이란 무거운 책을

생의 낱장마다 질척거리는 추억들을 새기는 것이다

이것이, 고작 이것이

내게 배달된 화물이란 말인가

 

어느 겨울날 아침

내게 배달된 화물은 크고 무거웠다

연약한 팔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화물을 옮기며

불현듯 깨닫는다

잘못 배달되는 화물은 의외로 많은 법이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몸에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창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바지는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 나가 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내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 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뒤흔든다

 

 

 여행자

 

 

산성비 내리치네, 바람 부는 저녁

노점상들 모두 판을 거두고

광장에 맨드라미처럼 붉은 발목 내놓고 뛰놀던

아이들 제 집으로 돌아간 뒤

산성의 더러운 빗방울들만

알전구 불빛 아래로 몰리네

 

구름 밖 교회보다 더 먼 곳에서 돌아온

이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여행자

옷깃에 아교처럼 달라붙어 펄럭이는 슬픔

등뒤에 캄캄한 문명을 그림자로 드리우고

박쥐우산을 펴들고 천천히 걸어가네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추운 몸으로 너를 안는다

아궁이에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만다라 불꽃이 피어날 때

눈빛에 광채 서린 사생아라도 하나 낳자

 

여자는 밤새도록 늑골 밑에서 자라는

잎사귀를 똑, 똑 따내리며 슬픈 노래를 하네

손톱에 뜬 초승달마저 바랜 새벽

얼굴에 그린 눈썹 지우며 우네

 

나무들은 바람 속에서 아득히 흔들리고

들길 너머 진흙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네

고달픈 세월 건너느라 이끼 돋은 몸 속에서

여자는 새를 꺼내 건네네

 

 

딸기

 

 

비애로 단단해진 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속에 있다

초록 줄기에 알알이 맺혀 있는 너는

별들의 계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붉은 것은 왜 오래가지 않는가

섹스 후 동물은 왜 슬픈가

차마 꽉 깨물어 터뜨리지 못한 채

혀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이 정체불명의 비애가 날 울린다

 

 

간장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항아리 물에 얇은 살얼음이 끼는 立冬

아침에 집밖에 내놓은 벤자민 화분 두 개가

저녁에 나가보니 행방이 묘연하다

누군가 병색 짙은 벤자민을 쏟아놓고 화분만 쏙 빼 가져간 것,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이다

아직도 간장을 달여 먹다니!

그렇게 제 생을 달이고 있는 자도

한둘쯤은 있을 터

 

검정 고양이가 아직 불켜지 않은 거실을 가로질러가는

多數의 저녁이

침울하게 지나간다

 

 

그믐밤

 

 

커피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새벽 세 시다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비트는 하얀 손이

낮엔 복숭아나무 죽은 가지 두어 개를 툭툭 분질렀다

아주 가까운 둔덕에서 소쩍새가 운다

그믐밤인가 보다

내가 청혼했던 여자의 잠도 깊겠다

내겐 벌써

저기 아득히 흘러가버린 과거가 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매우 숭고한

쓰라린 과거다

 

 

소금

 

 

아주 깊이 아파본 사람마냥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 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햇빛이 키우는 것은 단 하나다

한 방울의 물마저 탈수한 끝에 생긴

저 단단한 물의 흰 뼈들

저 벌판에 낭자한 물의 흰 피들

 

염전이 익히는 물의 석류를 보며

비로소 고백한다, 증오가

사랑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었음을

 

아주 오래 깊이 아파본 사람이

염전 옆을 천천히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증오보다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2007 / 꿈에 씻긴 눈썹)

 

 

난 건달이 되겠어



                          

나는 너무 오래 일에
미쳐 있었어.
흰 손 흰 얼굴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데.
망상은 줄지 않고
미친 피는 잠들지 않아.
구름 구두를 신고
카페에 나가 에스프레소나 마셔볼까.
카페 통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흘러가는 구름과
한가로운 거리를 내다보며
오후의 한때를 보낼까.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아가씨를 향해
휘익 휘이익 휘파람을 불면
아가씨가 뒤돌아보겠지.
그러면 눈웃음을 치며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야지.

지금 시간이 있느냐고,
나와 함께
춤출 시간이 있느냐고.

 

사이



강 중심을 향해 돌을 던진다.
장마가 끝나고
단풍 된서리 눈보라가 차례로 지나갔다.
다시 백로와 상강 사이
그 돌은
하강 중이다.

방금 자리 뜬 새와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
生과 沒
사이

밥과 술에 기대 사는 자가
담벽에 오줌을 눈다.
작약과 비비추, 호미자루와 죽은 쥐,
구접스러운 것들 다 황홀하다.
구융젖 빨고 구핏한 길 돌아
예까지 왔으니,
더러는 이문이 남지 않았던가.

돌은 제 운명의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사이
그 고요의 깊이를 측량하며
하강 중이다.

길례언
   - 천경자 화백

                        

목덜미가 허전할 때
목도리를 하자.
난간까지 내려온 달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칠흙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몌별의 목덜미는 오래된 지도다.
내 사랑을 찾는 데 꼭 필요한 지도다.
당신 목덜미에 노란 별들이 반짝인다.
사랑한 건 당신 목덜미뿐이었다고
불쑥 고백해버리면 당신
눈시울이 붉어질까.
희고 탐스런 구름으로
당신의 목덜미를 빚는다.
팔월이 끝난다.
새집의 대들보를 얹고 가을을 준비한다.
팔월이 가면 구월과 함께
순도 백 퍼센트의 이별이 온다.
눈빛이 깊어진 당신은
목이 시리다고 한다.
강물은 상류의 가랑잎들을 싣고 내려오고
나는 더 자주 강가에 나간다.
강물에 비치는 당신의 목덜미,
거기 찍힌 낯선 입술의 지문을 눈여겨본다.
사랑이 가고 나면 시린 목에
목도리를 두르자.
목도리를 두르고 보일러가 고장 난 방에서
겨울을 나자.
미닫이문들을 닫아건 뒤
긴 회랑을 걸어오는 사람을 기다리자.
아무리 바보라도 혼자 있는 사람은
조금씩 현명해지는 법이다.


*대추 한알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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