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문인수

향기로운 재스민 2016. 12. 2. 06:57



 
 


            

 

         



 

문인수 시인의 시 모음
   
 
          
     
   

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수상시]

 

 

드라이플라워 /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긴다
말린 장미·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버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뽀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동백 씹는 남자 - 문인수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우 눈 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 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작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 낄 낄 웃었다.

그의 안색이 동백 독이 오른 것처럼 잠시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림/통통이님의 블러그에서


벽의 풀 / 문인수

 

풀들은 어떻게 시멘트를 삭이는가, 사귀는가
이 도시의 4차선 도로변을 따라 높이 둘러쳐진 옹벽엔
오래 전부터 깊은 금이 구불구불 길게 가 있다
이 거대한 위압 아래가 한동안 고요한 때가 봄이다
상처에 자꾸 손이 가고 슬픔이 또 새파랗게 만져지는 것처럼
금간 테를 디디며 풀들이 줄지어 돋아나 자란 것이다
산야의 풀들에 비해 물론 몹시 지저분하고 왜소하지만
명아주 바랭이 참비름 강아지풀 같은 제 이름, 초록 정강이의 제 중심을 잘 잡고 있다
생이 곧 길이어서 달리 전할 말이 없는 풀들
흙먼지며 매연, 저 숱한 차량들의 소음까지도 꽉 꽉 다져 넣어
밟으며 빨며 더듬더듬 더듬어 풀들은 또 풀들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천산북로,
누더기 몸들이 누대누대 닦아가고 있다  

 

시집 <쉬> 2006년 문학동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

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

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

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

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

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에서.

 

사진/21c 고산자의 후예들 블러그에서

동강에서 울다/ 문인수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 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대숲  /문인수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힌 유적 같은 것이다. 그

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하

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

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 잘게 씹히거

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새떼 / 문인수


 저녁노을 속으로 깡통 소리 날아간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논물에 빠지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새떼는 여러 번 날아 오른다 한 삽 퍼 던진 자갈돌들처럼 한꺼번에 새까맣게 요란하게 날아오른다 휘영청 헌 보자기 내려 덮이듯 논빼미 저쪽 끄트머리로 다시 가 내려 앉는다 쥑이뿔고 싶도록 얄밉게 또 내려 앉는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땡볕에 악 받히며 종아리 긁히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지친다 어느덧 거물거물 해 늘어지고 마지막으로 두어 바퀴 휘이 나락논을 돌아 서천 붉은 구름 속으로 팍팍팍팍팍 꽂히는 새떼 자욱하게 스민

 

 노을의 측백나무 울타리 속으로 씻은 듯이
 나도 집에 돌아가곤 했다.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2006년 문학의전당

 

    굿 / 문인수

 

 나는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나는 그 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 째 굿모닝, 그런다. 한 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 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 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았거나 나는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쪽지보다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굿모닝, 그런다. 나도 웃으며 웬 무식? 그런다. 내가 겪은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당신이 내 눈 앞에 있다.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애지> 2006년 겨울호

 

지네 / 문인수

 

- 서정춘 傳

 

어머니는 그 때 만삭에 가까웠다

아버지와 어떤 사내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고 있었는데 그만

누군가의 팔꿈치에 된통 떠받혀 벌러덩 자빠져 버렸다

 

나는 태중에서부터 늑골 아래가 아파 몹시 울었다. 세상에 툭, 떨어지자

나는 냅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잠시도 그치지않고 새파랗게, 새파랗게 질리며 울었다

1941년 생, 나는 아직도 피고름 짜듯 가끔, 찔끔, 운다

 

난 지 삼 칠 일만에 늑막염 수술을 받았다

난 지 두 돌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마부 아버지와 형들은 모두 거구였지만 배냇앓이 때문일까, 젖배를 곯았기 때문일까, "나는 평생

삼 短이다. 체구가 작고 가방끈이 짧고 시인 정 아무개의 말처럼

 '극약 같은 짤막한 시'만 쓴다

가난이야 본래대로 바짝 조여 웅크리면 된다

당시엔 당연히 가슴 쪽에 나있던 수술자국이 이 시각,  

왼쪽 등 뒤 주걱뼈 저 아래까지 와 있다. 이것은 이미

의학이 잘알고 있는 현상이긴 하지만 생각컨대

이 징그러운 흉터야말로 몸을 두고 공전하는 기억이지 싶다, 궂은 날,

지금도 수천의 잔발로 간질간질간질간질 세밀하게 기면서

씨부럴,

이 썩을 놈의 슬픔이 또, 온다, 간다

 

푸른 시 (2006년 제8호)

 

빨래궁전 / 문인수

 

                                                                 - 인도소풍

 

    야므나 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으로 숨어버렸는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중화리 /문인수

대숲 대나무 꼭대기에 까마귀 떼가 시꺼멓다.
대나무들 우듬지가 휘청휘청 몸부림치며 날아오르려 하고 까마귀들, 커다란 열매처럼 한사코 주렁주렁 자리 잡으려 한다. 풀리지 않는다.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지 까마귀들 제 날개에 붙어 한꺼번에 후다닥 가볍게 떠 날아가고, 대나무들은 또 제 뿌리 짬으로 붙어 일괄 시퍼렇게 와스스 돌아온다. 에라, 마음 비운 것처럼 생멸처럼 어느 명절 끝처럼 결국
만사 해결된 것처럼 고요하다. 이 곳 역시 노인들만 사는 마을,  
중화리. 없는 것 빼고 컹 컹 컹 컹 다 있다.

 

 

    폐가의 배꼽 / 문인수
   
  이 외곽지 야산의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출퇴근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끌고 온 탯줄 같은 거,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삐뚤삐뚤 나고 있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게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마당의 소주병들처럼 나뒹굴며 폭우 아래 지나갔다.
  그 위를 덮으며 풀들이 화염처럼 지나갔다.
  풀을 베자 뱀 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채 한 채의 폐가여서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는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의 조롱박들이 아침에
  시퍼런 똥자루처럼 자꾸 힘껏 빠져 나온다.

 


밝은 구석 / 문인수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세간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밟히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시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 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꺼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구석자리에, 끝끝내 붙박인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문학사상> 2004년 6월호

 

창포 

 

- 문인수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롱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
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
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 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파냄새 /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 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꽉 다문 입, 태풍이 오고 있다 / 문인수

 

새벽에 들어오는고깃배들을 본다

빈 그물엔 불가사리만 흉흉하게 붙어있다

밤새 건져올린 죽은 별들

저것이 희망이었겠으나 힘껏 탁 탁 털어낸다

 

마음이 또 꽉 다무는 입, 저 긴 수평선

 

방파제 굵은 팔뚝이

태풍의 샅을 깊숙이 틀어잡고 있다

 

 

꼭지 /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생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
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 문 인수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다.


 대구에 가면 이런 거 흔하고 흔합니다 헐하고 헐합니다 하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나도 많이 늙었다 오래는 더 못 살겠다 하시면서, 무말랭이며 머귀나물 매운 풋고추 같은 걸 자꾸 챙겨 주셨다. 이만큼 전송 나오시다가 또 쫓아들어가 다른 거 한 보퉁이 들고 나오셨다.

무릎 앞에다가 이것들을 끌러놓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여름밤 천지에 가득하고 그윽한 먼 별빛,

긴 바람의 젖을 물고 나는...


 

   사진/시의 우물을 들여다보며님의 블러그에서


두메, 빈 집에 들어서니/ 문인수


싸릿대 삽짝 풀썩 허물어진다 누구요
오두막 헛간채의 삭은 디딜방아가 쿵더쿵 쿵덕 오래 쌓인 먼지를 찧고 있다 누구요
봉당에 매달린 솔비 짚소쿠리 함지박서껀 쿵덕쿵 쿵덕 한꺼번에 흔들린다 누구요
쪽 마루 밑 삽살개 소리도 자지러지게 굴러 나와서 앞마당 수북이 강아지풀 개밥풀들이 바람 밑으로 뒷곁으로 달아난다 누구요
방문 정지문이 쿵덕쿵 쿵덕 여닫히며 허물어지며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누구요

 

수장(樹葬)


- 문인수


나무 한 그루를 얹어 심는 것으로
무덤을 완성하면 어떻까.

평평(平平)하게 밟아
그 일생이 보이지 않으면 되겠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 뒤축이 다 닿은 족적은 그 동안
없는 뿌리를 앓아온 통점이거나 죄(罪),
쓸어모아 흙으로 덮는다면 잘 썩을 것이며
그 거름을 빨아 한탄 무성하면 되겠다.

어떤 춤으로 벌서면 다 풀어낼 수 있겠는지
느티나무든 측백나무든 배롱나무든 이제
오래 아름다운 감옥이었으면 좋겠다.

 

 

 

중심을 잡다 /문인수

 

 

하늘이 잠시도 눈 떼지 못한다.
강아지풀 하나가 왜 하필
이 거친 돌담장 위에 올라서서 하늘을 쓰고 있나
미루나무 큰 키가, 방올음산 꼭대기가 그러하듯이
상모 돌리듯 상모 돌리듯
제게 꼭 맞는 모자인 양 하늘을 쓰고 있다.
가느다란 모가지며 정강이로 추는 춤,
폭우와 암흑의 나날이 상세하다.
바람에서 뽑은 섬유질 같은 것
세필로 적는 일대(一代)가 새파랗게 질기다.
파란만장의 강아지풀 하나가 잠시
가만히 귀 기울이다가 다시 즐겁게,
즐겁게 하늘을 쓰고 있다.

 

2박 3일의 섬 / 문인수

 

2박 3일 일정으로 섬에 들어갔다.

섬은 허퍼 한 번도 섬을 구경하지 않았다.

 

바다가 바다를 구경하지 않듯이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를 구경하지 않듯이

갈매기가 갈매기를 구경하지 않듯이

수평선이 수평선을 구경하지 않듯이

통통배가 통통배를 구경하지 않듯이

일몰이 일몰을 구경하지 않듯이

별빛이 별빛을 구경하지 않듯이 또한

그 무엇도 다른 무엇을 구경하지 않듯이

 

바삐 바삐 漁具를 챙기는 어부들,

한 팀 꽉 짜인 저 바다.

어깨 너머 기웃거리다 머뭇거리다 가는

나는 섬, 2박 3일 떠돈 섬이었다.

 

오징어 / 문인수

                                                                       

억누르고 누른 것이 마른 오징어다

핏기 싹 가신 것이 마른 오징어다

냅다, 불 위에 눕는 것이 마른 오징어다

 

몸을 비트는 바닥을 짚고 이는 힘

총궐기다

하다못해 욕설이다

 

잘게 씹어 삼키며

무수한 가닥으로 너를 찢어발기지만

너는, 시간의 질긴 근육이었다

 

제 모든 형상기억 속으로

그는, 그의 푸른 바다로 갔다 

 

 

매미소리
- 문인수

나무들은 나름대로 전원 각기 적소에 서 있다
그리움은 그러나 혼자 살지 못하고
지하공장에서 올라온 것처럼 일사불란한 작업 중이다
암흑에서 뽑은 강철심같은 것 무수히 내지르고 있다. 나무들이 내
는 금속성은 듣기에도 어째 거북하지 않다.
질긴 그 노래로써 요새
숲을 새로 짓고 있다. 수북하게 부풀어 오른 녹음이
거친 산악을 한 번식
해일처럼 거대하게 흔들어보곤 한다. 무공해 신도시는
튼튼하다. 삼나무 고사목이 나무들의 공중전화 부스처럼, 송신탑
처럼 장대하게 서있다. 팽팽한
신경섬유 같은 것,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틀어
의미망이라 한다. 빗방울, '나비바람' 한 점에도
숲은 널리 젖거나 고봉으로 다시 설렌다. 누가 울었다, 봐라
저녁 노을 또한 왕창,
전 세계적으로 한꺼번에 울창하게 걸린다

 

 

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문인수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떠받혀 오래 아프다.
아시다시피 모서리의 안쪽이 구석이고
구석의 바깥쪽이 모서리인데
이 단단한 명.암의 어떤 내용이
이 책상에서 불쑥 나온 원목의 어떤 일갈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날 일부러 한 대 쥐어박은 걸까
그러나 무슨, 악의에 찬 공격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벌목 현장의 열대 우림을 쩌억 갈라붙이며 우지끈
쓰러졌을 때, 그때 지축을 흔든 우레의 뿌리,
혹은 엄청난 수령의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저릿하다.
그 여진이겠지만, 아직도 직진인 것 같다.
창공을 찌르며 내쳐 홀로 가는 외뿔, 그런 정신이
老巨樹의 망한 몸인 이 책상 어디에
책상으로 가부좌를 튼 오랜 시간 내내
그대로 옹이 박혀 있었구나 나는 종일 빈둥거렸으니
무슨 길을 잡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근심들이 밀어 올린 외로움은 쥐뿔도 아니어서
병인 것 같다. 오늘 다시
떠받힌 데를 들여다 보니 멍이 다 들어 있다.
드높은 우듬지 끝이 시퍼렇게 만져진다.

[문학과경계] 겨울호

 

 
  만금이 절창이다/ 문  인  수

 

  물드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따라 무겁게 되밀려 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저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은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

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삻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그림 같다, 사정없이 계속

  셔트를 누른다. 여인네들... 여 나문 명 누더기 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 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 놓으며

저 할머니, 꺼질듯 첫

  일성을 토한다. "어매 징한거, 참말로 죽는 거시 낫것어야" 참말로, 정색

이다. 말짱

  카메라에 박지 못한 것, 철컥─ 가슴에 와 박히는 것, 뭉툭한 뒤축 같은

것,

  늙은 연명이 뱉은 저 말이 절창이다.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저 할머니의 슬하/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

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 시집 ‘쉬!’(문학동네) 중에서

 

 

동강의 높은 새 / 문인수

 

동강 높이 새 한마리 떴다.

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

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

단 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

 


땅 끝 /문인수

 

끝났다. 모든 길은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

땅끝마을 땅끝에다가 슬쩍

발끝을 갖다 대보고는 씁쓸히 웃는다.

가파른 언덕 아래

밤바다 파도 소리가 폭풍을 안고 거칠다. 지느러미,

부레가 없는 지난날의 절망 따위여

포말, 포말,

캄캄하게 에워싸며 파랑치던 야유를 기억한다.

다시 출발하자고 막 돌아섰으나

질풍노도라는 말, 혹은 말,

저놈의 갈기를 잡고 올라타 본 적 없다.

나는 한 번도 부려먹어 보지 못한 세월,

세월이 끝내 준 것이라고는 도대체 청춘뿐이다.

지금은 늙어 아무것도 자멸하지 않고

땅끝마을 왔다가 돌아가는 초행길이지만

땅끝과 발끝,

말단끼리는 서로 참 돈독한 데가 있구나

소싯적부터 오래 잘 알고 지낸 사이 같다.

 

 

힘 - 문인수

 

폭포 직전 물의 근육은 팽팽하다.

 

이제 저 허연 광목 필 틀어잡고

남김없이 부서지는 물보라의 화염으로 당기는 것,

 

개벽 당시를 본다.

 

고요는 마침내 만발, 만삭을 푼다

 

유등연지 /문인수


 

9월 유등마을 연지엔 연잎들이 모두 나와 물을 덮고 있다. 누가 물가 풀
섶에 빛바랜 운동화 한 켤레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저런, 낡은 죽음의
이미지조차도 이쁜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짧게 사라진다. 배고프다 문득,
연잎에 이는 한바탕 소나기 소리가, 그런 바람의 비늘이, 달빛 냄새가 궁
금하다. 아, 꽃지고도 많이 남은 초록 날짜들이 남몰래 빨아먹는 슬픔이
있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문인수

 


말 걸지 말아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그림/통통이님의 블러그에서


 비 /문인수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아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 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나방/문인수

 

갈색나방 한 마리가 이틀째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한 쪽 벽에,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에 납작 붙어 있다.
오체투지하는 것 같다.
천장에서 방바닥까지의 거리를 재는 듯
그렇게 날개를 쫙 펴 붙이고 있다.
그러다 잠든 걸까, 숨조차 멎은 것 같다. 그새
문밖엔, 뜰엔 목련꽃 더 많이 터져 올라 눈부신데
절방에 들앉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득한 하늘 아래, 어둔 땅 위에
나도 양팔을 벌린 채 힘껏, 가만히 누워 배긴다.
풍경소리, 대바람소리, 잘 마르지 않는 과거가, 슬픔이 있다.

 

 

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인데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문인수

 

1945년 6월 2일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1월 1일 「심상」 신인상 등단. 1996년 12월 30일 제14회 대구문학상 수상. 2000년 6월 6일 제11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2003년 12월 20일 제3회 노작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등이 있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문인수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서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훨씬 못미쳐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으로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P 72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문인수 시집에서...

2016. 12. 02  경주에서 있을 동리 목월 상을 축하드리며...
향기로운 재스민 김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