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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작가론> 문인수 시인- 똑딱 카메라에 찰칵찰칵 담아낸 냄새와 소리들/ 권순진

향기로운 재스민 2016. 12. 4. 22:33




<작가론>문인수 시인- 똑딱 카메라에 찰칵찰칵 담아낸 냄새와 소리들/ 권순진



 간단한 볼일을 핑계로 혼자 일본에 갔다가 그제 돌아왔다. 5시10분경 대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픽업한 차를 몰고 동리목월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경주 The K호텔로 달려갔다. 이번 목월문학상수상자인 문인수 시인으로부터 ‘특별한’ 원고청탁도 받은 처지고보니 현장에서 축하인사를 아니 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 좋은데 온 나라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 마당에 일부 주최 측 인사가 과거 수상자인 이문열 복거일 등 대표적 보수 문인들을 치켜세우면서 마치 동리목월문학상이 범보수 측 문인에게 주어지는 상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 것은 몹시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부적절한 발언일 뿐,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 실질적인 분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인수 시인에게 받은 원고청탁은 이번 계간 《동리목월》 겨울호 수상자 특집의 문인수 <작가론>이었다. 작가론은 작가의 이력이나 살아온 삶에 대한 밀도 있는 분석을 통해 작품론과 함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일종의 문학비평이겠는데, 솔직히 필자의 식견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영역이다. 더구나 <작품론>은 유성호 평론가가 쓴다고 해서 부담은 가중되었다. 여러모로 자격 미달인데다가 설령 쓴다고 해도 깜냥으로는 너무나 부담스런 노동이 될 것 같아 당연히 고사를 했다. 그러나 무명의 고향후배에게 ‘기회’를 주려는 심사란 걸 모를 리 없기에 길게 손사례 치기는 어려웠다. 덜컥 한번 해보겠노라고 대꾸해 놓고서도 부담은 쌓여만 갔다.


 흐릿한 30촉 백열등 조명 아래 주섬주섬, 은근슬쩍, 듬성듬성 야바위꾼처럼 갖다 붙일 도리밖에 없음을 미리 밝히면서 문인수 시인과 독자에게 머리 긁적이며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 도리이지 싶었다. 어쩌면 평면적 이력의 나열이나 단편적인 생활 동선의 소개에 그쳐 문인수 시인의 명성을 깎아내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다. 이런 난감한 청탁이 올 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파고들어 공부도 좀 하고, 평소에 궁금한 것도 꼬치꼬치 물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며칠 조빠지게 글 노동을 했고, 다행히 시한 안에 난삽한 원고를 넘길 수 있었다.



<작가론> 문인수 시인

 

똑딱 카메라에 찰칵찰칵 담아낸 냄새와 소리들 - 권순진(시인)

 

1.

문인수 시인을 만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 자신이 본의 아니게문단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시기가 2000년쯤 되어서, 그때 문인수 시인은 시가 대책 없이 막 터져 나오던 광휘의 시절이었다. 그해 55세의 나이로 김달진 문학상을 받는데, 중앙문단에서 문인수란 시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상을 준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 무렵 문학상은 언감생심이었고 시 쓰는 재미에만 푹 빠졌었다고 그는 말한다. 문인수 시인이 큰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그 시기에 나는 문단의 후미진 입구에 삐죽이 발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는 근접거리에 접근조차 힘들었으며 마음대로 쳐다보는 것도 어려운 관계였다. 시인과는 동향이라 해도 성주군 초전면과 선남면은 압구정동과 가리봉동의 거리만큼이나 멀기도 하거니와 8년쯤의 시차가 있고 심정적인 유대나 특별한 끄나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2007년 이른 봄날로 거슬러가서 먼발치에 있던 시인과 드디어 가까이에서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지역의 문학 선배들 몇과 함께였다. 그 자리에서 흥미로운 정보 하나를 얻어듣는다. 그즈음 낙양의 지가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문학상 후보에도 오르고 미당 문학상에는 몇 해째 유력후보로 최종심에 이름을 올린 터였다. 2005년 심사위원이었던 정현종 시인은 문인수의 작품을 읽고서 이 친구, 아무리 봐도 지금이 전성기야.”라고 했다는 한마디 평은 잘 알려진 바다.

 

며칠 전 서울에 갔더니 우리 문단의 최상단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선배들이 문시인은 작품으로야 손색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아무래도 당분간 최종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할 걸세라는 말씀을 문인수 시인에게 하더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수긍하면서 마음을 다 비운 상태였는데, 아뿔싸 얼마 후 덜컥 미당 문학상을 수상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도하 각 신문지상에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그의 벼락같은 출세를 앞 다투어 보도했다.

 

늦깎이 등단에다가 예순의 나이, 지방 거주 시인, 동국대를 다니다 중도에 그만두고 군대를 가버리긴 했지만 실질적인 최종학력은 고졸. 당시 신정아 사건이 전국을 강타할 무렵이었으므로 파급력은 더 컸다. 문단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라며 일제히 반겼다. 축하전화와 문자가 쇄도했다. 가장 인상적인 축하가 이정록 시인이 술 마시다 대뜸 전화해 똑딱선 기적소리가~’로 시작되는 만리포사랑노래를 들려준 것이라고 했다.

 

2.

문인수 시인은 언제나 어떤 원고에서나 스스로 쓴 약력란에는 거의 빠짐없이 ‘1945년 성주 출생이란 관등성명을 적어 넣는다. 성주 촌놈임을 은근히 자랑할 만큼 고향사랑이 깊다고 해야겠다. 사회 경력이라야 영남일보에서 잠시 기자 생활한 것 말고는 뾰족이 내세울 게 없다. 그 흔한 단체장이나 무슨 직위, 감투 같은 것도 당번 서듯 대구시인협회장을 맡은 것 말고는 전무다. 물론 지금은 시집 11권 동시집 1권 시조집 1권 등의 저서와 줄줄이 수상경력이 매달릴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줄여서라도 이 원칙만은 지키려 한다.

 

고향 성주는 문인수의 시가 발아했던 곳이기도 하고 많은 시가 태어난 문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한 시인이 나서 자라고 동무들과 어울리고 가족들과 살림을 했던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면, 시인에게 성주는 시의 소재를 풍성하게 제공해주는 원천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인치고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삼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만, 그 이야기가 보편적 향수로 승화되어 사람들의 가슴에서 향토적 서정을 일깨울 수 있을 때 의미와 가치는 증폭된다.

 

시인이 32녀의 막내로 태어난 곳은 경북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630번지이다. 하지만 지금 그곳엔 시인의 생가라 기억할 어떠한 흔적의 꼬투리도 없다. 물론 생가터라는 작은 나무 안내팻말조차 없다. 지난여름 한 지인으로부터 문인수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고 싶다면서 전화로 위치를 묻기에 낫씽!’이라고 간략히 일러주었다. 대신 고향어귀 어디쯤에서 치켜다보면 멀리 북쪽에 삼각형으로 뾰족이 솟은 방올음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흰내가 흐르는데 가볼 테면 가보라 했다. ‘방올음산흰내는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장소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시인은 그동안 문학을 하면서 고향에 참 많이 기대어 왔다. 고향에 기대면 어머니의 품속처럼, 달 아래 선 것처럼 삶의 이런저런 상처가 잘 나았고 또 죄가 모두 용서되었다고 했다. 그 서러움과 상실감을 지금까지 시로 써 온 셈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이제 몸이 가서 닿을 수 있는 한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 가서 닿을 수 있는 지나간 시간이며 아름다운 기억일 뿐이다.

 

농촌인구가 나라 전체 인구의 8할이 넘던 시절, 가난이 죽을 쑤던 그때의 아이들은 그러나 공부에 찌들 일 없어 명랑했다. 시인의 어린 시절은 나름 능력 있는 아버지 덕에 경제적으로는 그럭저럭 살만 했다고 한다.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며 구김살 없이 놀았고, 잔대뿌리며 삘기며 산딸기며 뭐든 저 알아서 군입을 다셨다. 시인도 그 '야생의 아이들' 속에서 소 먹이고 꼴 뜯으며 초·중학교(초전초등학교·성주중학교)를 마쳤다.

 

시인은 스무 살 무렵까지 그리도 싸움질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했다고 한다. 동네 패거리와 함께 장날이나 단옷날, 혹은 사월초파일, 그리고 학교운동회 등 무슨 잔치가 벌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연히 낯선 '놈들'을 집적거리고 다녔던 것이다. 특히 초파일이면 어김없이 이웃 면 '선석사'(세종대왕자 태실에서 지근거리에 위치한)로 몰려올라가 꼭 한 판씩 붙곤 했다. 그러던 시인은 그 기간에, 그러니까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62. 성주농고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를 졸라 대구의 대구고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3.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였던지 아무튼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질투로 '쟁취'한 길이겠는데 시인에겐 최초의 '출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돌이켜보면 그 일이 내 잘못 든 길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훗날 술회한다. 이십대 중·후반까지 시인은 자주 어깨가 처져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타관객지에서 고향을 헌옷처럼 벗어 처박아놓고 대책 없이 빈둥거린 그런 청춘의 세월이었다. 그 지리멸렬한 날들을 지금은 다 허물어져 폭삭 주저앉은 그 옛날의 집터만이 고스란히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고향은 역시 육친 같은 것이라, 어디 먼 곳을 여행하면서 고향땅에서 나는 '성주참외'라도 볼라치면 머잖은 피붙이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래서 시인에게 고향은 내내 그리움의 산천인 동시에 시적 영감의 젖줄이며 작품의 원천인 것이다. 단박에 유년의 기억을 오롯이 재생해내는 그때 그곳이며, 내 아버지·어머니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그때의 영혼 속에 기록되어 선명하게 인화된 것들만이 진정한 고향의 모습일 것이다. 그 모습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고향사람들과 그들의 삶이었다.

4.

앞에서 언급했지만 시인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특정 고유명사가 '푸른 고래등' 같았던 방올음산(해발 782m)’과 마을 앞을 흐르는 흰내’(白川)이다. 그의 고향 관련 시 일백여 편 가운데 방올음산과 흰내가 등장하는 시만 해도 족히 서른 편은 된다. 특히 시집<홰치는 산>에는 전편이 아예 고향으로 빼곡하다. 숱한 시편에서 이 방올음산이 배경처럼, 촌장처럼 등장해 고향을 직접 말하거나 상징한다. '홰치는 산'이야말로 방올음산이 단연 주역이다. 방올음산에다가 아침노을(붉새)을 커다란 날개처럼 걸쳐 시뻘겋게 홰치는 수탉 이미지를 펼쳤고, 그 장관의 방올음산을 다시 아버지에게 활활 입힌 시이다.

 

그런 꿈에도 그리운 고향산천임에도 막상 시인의 고향에 들어가 보면 그의 고향은 없다. 사람들도 아파트를 비롯한 둘레의 환경들도 모두 '객지'의 모습이다. 그의 시에 반복해서 나오는 방올음산을 찾아 수년 전 국문학 교수 몇몇이 초전엘 들렀는데, 동네주민들이나 면사무소 직원들 중 그 누구도 방올음산이 금시초문인 듯 깜깜 모르더라는 일화를 들었을 땐 공연히 내 죄인 듯 면구스럽기까지 했다. 면사무소 앞마당이건 동네 어디서건 빤히 시퍼렇게 올려다 보이는 그 방올음산을 모르다니, 시인은 더욱 기가 막혔다. 고향 땅을, 고향 사람들을 지켜온 그의 시의 '우두머리'인 방올음산이 고향 땅에서 삭제되거나 실종된 것이다.

 

5.

방올음산이 거느린 고향이 없었더라면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평범해 뵈는 산이지만 그 산이 고매한 정신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을 터이므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톨스토이는 어른이 되고서야 야스나야 폴랴나의 대평원을 벗어나 처음으로 산이 있는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우뚝 솟은 산에서 영혼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어쨌거나 유·소년기에 각인된 고향이야말로 문인수 시의 토양이요, 발원지가 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초전초등 4학년 때 문예반 담당선생님의 황홀한 칭찬 한 마디가 못된 아이 하나를 춤추게 했고, 그때 얻어걸린 존재감이 바야흐로 시업의 길로 들어선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영문 모르고 문예특활반에 배속됐는데, 어느 날 동시 한 편을 숙제로 써냈더니 문예반 선생님께서 '경천동지할' 칭찬을, 그것도 '융단폭격'처럼 퍼부었다는 것이다. 생전 칭찬이라곤 변변히 듣지 못했던 소년에게 그 칭찬은 운명적인 계시가 되어 생의 변곡점이 된 셈이었다.

 

시인은 뒷날 찰칵하고 내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날이었다고 규정했다. '싹수'가 머리 굵어 객지를 떠돈 시기에도 옹이처럼 박혀 빠져나가지 않아 그것으로 결국 '늦깎이 시인'이 되었고, 지금은 성공적으로 참하게 늙은 시인으로 살아가도록 하였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배경, '고향이라는 거름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가에게는 고향의 산천, 말투, 관습, 나아가 고향의 공기와 인심까지도 문학적 태반이 되며, 작가는 이를 자양분으로 작품을 배양해내는 것이다. 그렇듯 작가에게 있어서 고향은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니며 그래서 더욱 중요시된다. 오래도록 남을 작품들이 당대뿐 아니라 후세에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외국이나 다른 지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유명 작가의 삶의 흔적들을 잘 보존 관리하여 작품과 함께 고스란히 후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야하는 이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심미안으로 고향의 정경을 재구성해온 문인수 시인만큼 치열하게 일관된 시적탐구를 지속한 문인도 드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그리움의 긴팔로 수시로 호출하는 고향에 대한 애정에 비해, 고향과 고향 당국이 그에게 내미는 대접은 야박한 편이다. "시를 가장 잘 이해하려면 그 시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조건 아래 살았으며, 그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곳의 풍경이 나를 치유하듯이 내가 쓴 시가 다른 사람의 치유에 조금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행복한 일이다.”라고 덧붙이며, 그는 정작 고향에 대해 바랄 건 없다고 말한다.

 

6.

문인수는 인고의 긴 시간 터널을 빠져나온 시인이다. 젊음의 방황과 긴 침묵, 그리고 마흔 넘어서야 등단해 예순에 물이 오르고 빛을 본 시인이다. 그는 평생 자신을 쥐어박으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자책, 자괴, 자기비하, 자학 등 ()’가 들어가는 말들이 돌림병처럼 둘러싼 삶이다. “나의 상처는 남이 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한테 가한 것들이지.” 대처로 나가 문학 활동을 하고 싶은 욕심에 대구고로 전학했건만 도시 학교는 그를 주눅 들게 하기 충분했다. “성주에서 글깨나 쓴다고 생각했는데, 대구에 와서 보니 명함도 못 내겠더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거쳐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줄곧 글쓰기에만 매달렸다. 교내 백일장이다 뭐다해서 상 탈 일이 더러 생겼고, 그때마다 그는 으쓱해져서 잔뜩 티를 내고 다녔다. 대구고에 와서도 문예반에 들어가 1962년 가을 시 해바라기<학원>지에 발표하고, 이듬해인 고3때는 매일신문 학생 시원란에 부엉이란 작품이 실리면서 본격적인 학생문단에 진출했다. 확실한 근거, ‘족보를 들이댈 수 있는 문인수의 처녀작이었다. 시골 농업고등학교의 그 최고는 아니었지만 전혀 꿀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잘 사귀지 못하고 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1964년 고교 졸업 후 잠시 방황을 하다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을 하였으나, 조금 다니다 말고 1966년 육군에 자원입대한다. 입대와 더불어 그의 문학청소년 시절은 스스로 막을 내렸다. ‘모든 문학인구와 문학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버린 것이다.’

 

7.

1969년 군제대로부터 1985년 심상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하기까지의 낭인시절을 돌아보면 외도가 참 길었다. 제대 후 그 어디에도, 무엇에도 자리 잡지 못한 채 온갖 데 객지를 떠돌았다. 시인은 감히 될 수 없다고 자조했다. 가끔 혼자서 뭘 끼적이면서 이런 저런 대중잡지 등에 독자투고 따위의 을 하긴 했지만, 아무런 지향도 없는 자위적이고도 소모적인 글쓰기였다. 이를테면 그 시기의 글쓰기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같은 것이었다. 문학에 대해 깊이 좌절했던 것 같고, 등단을 위해 어디 한 번 도전해 보지도 않은 채 시인에의 꿈이 완전히 접혀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리멸렬했던 문청기는 심연의 수압을 견디며 솟구치는 생명에 대한 탐구의 시대였으리라. 그는 41세에 늦깎이 데뷔를 함으로서 비로소 시의 항구를 찾았고, 정처 없는 부유의 생활, 자신의 눈을 찌르는 극단적 자학의 시간을 마감할 수 있었다. 1975년 결혼한 아내 전정숙의 권유와 그의 몸속에 잠재울 수 없던 불꽃의 시간들을 모아 1984년 심상지에 시를 투고하게 되고 등단작품이 19851월호에 실린다. 시상식장에 두 형님과 두 누님 등 가족이 총 출동하여 참석 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쾌거였다. 등단을 실감한 그 때의 기쁨은 여전히 설렘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등단이 주는 위로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 실로 본격적인 마음고생과 몸 고생이 시작되었는데, 십여 가지의 직장과 직업, 그리고 사이에 더 긴 백수기간이 악순환 되는 세월이 시인을 흔들고 체벌했다. 그야말로 그에게도 몸뚱아리 자체가 피눈물 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90년 가을 영남일보에 들어와 985월 교열부에서 명예퇴직을 했던 사이의 7년이 가장 오래 머문 번듯한직장 경력의 전부였다. 소소한 보람이란 것도 없지 않아, 기자 시절 권정생 작가 인터뷰 기사를 보며 그는 감개무량해했다. 그는 권정생 선생을 '지상에 잠시 다녀간 천사'같은 분으로 기억하면서 '정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힘이 이기고 있는 세상에 작가정신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용 대목에 스스로 흡족해 했다.

 

8.

시인은 첫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를 등단 이듬해인 1986년에 냈지만 좀 성급한 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첫 시집은 한 시인의 진로이며 디딤돌인데, 자기만족을 서두르느라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이다. 단편적인 시상을 엮은 시집으로서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후배들에게는 첫 시집을 서둘러 내지 말라는 조언을 하곤 한다. 2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는 영남일보 입사하던 해인 1990년 발행으로 고향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의 이런저런 기억들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19923시집 을 진정한 의미의 첫 시집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내면의 정서와 삶의 편린들을 엮은 작품집으로, 그는 이야말로 자기연민, 비애, 분노 등을 가장 많이 담아낸 본격적인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7년 뒤, 신문사를 그만둔 이듬해 19994시집 홰치는 산을 대구 만인사에서 내는데, 이로부터 문인수 시의 빅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홰치는 산또한 일관된 주제로서 고향을 배경으로 하여 농촌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풍경, 아버지의 농경 등을 담아낸 시집이었다.

 

2000년 김달진문학상 수상 작품집이기도 한 5시집 동강의 높은 새에는 우리네 한의 정서인 정선아라리의 혼을 담았다. 시인은 밀레니엄 이후 스스로도 이거 웬 떡인가싶게 글쓰기에 신명이 붙었다. 그 신명으로 정선을 섭렵했다. 정선은 아리랑의 발원지다. 아리랑은 한의 소리이고 한은 결핍이다. 결핍은 결국 서러움이다. “아라리,/이 애터지게 느리고 구성진 가락을/동강 물길 위에 놓아, 천천히 풀면서 나는 나를 용서한다. 정선에 가면 용서가, 시가 잘 된다.” ‘정선이란 공간, 전생의 고향이듯 내 것인 정선, 그곳에 가면 다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 정도로 정선에 매료되었다.

 

정선에서 여인숙 방에만 틀어박혀 2박을 낭비한 적도 있다. 그리고서 밖으로 나와 시를 썼다. 정선은 그렇게 고립도 무위도 힘이 되는 곳이었다. 그는 시집의 자서에서 시간의 아득한 저편에 존재하는 기억들을 재구성하는 형식을 통해 삶의 궁기(窮氣)’를 말했다. 물론 그 삶의 궁기를 가장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여행지도 정선이었다. 시인은 정선을 한의 본향이라고 규정했다.

 

여행은 일상을 갈아엎는 쟁기질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쟁기질로써 땅이 더욱 싱싱해지는 것처럼 여행이야말로 깜깜하게 가려진 일상 너머로 대상을 더욱 새롭고 명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 쓰는 이에게는 여행이 꼭 필요한 자극이라며 궁합에 맞는 변방을 시인은 뻔질나게 나돌아 다녔다. 전라도 섬진강에서 강원도 정선 땅으로, 그리고 영월의 동강에서 다시 경상도의 우포늪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9.

시인의 시를 불러내는 길이 먼 거리의 여행지만은 아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인 동부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대합실 벽에 붙은 행선지들을 쭉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지명 하나를 골라 당일치기로 곧잘 쏘다녔다. 누리끼리한 줄무늬 티셔츠에 유치원 아이처럼 자그만 가방을 어깨에 비껴 멘 모습은 하절기의 익숙한 그의 모습이다. 그 차림으로 어디든 간다. 당초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끌리는 무엇이 있으면 중간에 내릴 때도 많다. 그곳 가는 날이 장날이면 아주 좋다.

 

2012년에 낸 8시집 적막소리에는 모량역이란 간이역 이름이 붙은 시편이 왕창 일곱 편이나 수록되어있다. ‘모량역시 그렇게 해서 아무렇게나 끌려서 당도한 촌구석인지도 모른다. 모량역, 모량역의 거울, 모량역의 새, 모량역의 시간표, 모량역의 운임표, 모량역의 지층, 모량역의 하품 등인데, 모량역은 경북 경주시 건천읍에 소재한 간이역으로, 모량리는 바로 목월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사전에 무슨 이 통했던 걸까.

 

2006년에 나온 6시집 !의 많은 작품들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문인수의 시는 모두 그 길 위에서 만나고 포개진 비애 덩어리. 그 길은 고창 고인돌 마을과 동해 바닷가인 영덕 화진포, 남해 땅끝 마을, 매물도, 영월 청령포, 서해 변산반도 채석강을 길게 휘돌아 나가서 멀리 인도에까지 닿았다. 인도 여행 뒤 열흘간 시가 떠나지 않아, 생전 처음 "몰아서 썼다"'인도소풍' 연작시는 14편에 달한다. 시편들은 대부분 타즈마할 궁전 같은 외관의 화려함보다는 빨래궁전’ ‘모닥불’ ‘굴렁쇠’ ‘똥덩어리로 대표되는 길 안쪽의 어둠을 품고 있다. 그들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빛은 언제나 촉촉한 물기로 젖는다.


10.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집단 메그넘의 창시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역사적인 사진 한 장이 전해진다. 그가 찍은 1938년작 '조지 6(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의 아버지)의 대관식'이다. 모든 카메라 플래시와 사람들의 시선이 대관식의 하이라이트에 몰려있는 사이, 한 남자는 전날 숙취가 덜 풀렸는지 신문 쓰레기더미 위에서 무심하게 늘어져 낮잠을 잔다. 브레송만이 그 순간을 포착하여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흥미롭게 조명했다. 그 사진 한 장 이후로 사진이 테크놀로지가 아닌 예술로서 대접받게 된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재빨리 포착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응시한 결실이다. 수많은 사진가들이 보다 성능이 개선된 중형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그는 평생 똑딱이 라이카만을 애용했다. 브레송은 말한다. "현장범을 체포하는 것처럼 길에서 생생한 사진들을 찍기 위해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곤 했다. 무엇보다도 돌발하는 장면의 정수를 단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포착하고 싶었다." 바로 이와 같은 고유의 사진 철학을 그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렀다. 중무장한 장비가 아니라 그저 한 손으로 충분히 쥘 수 있는 라이카 카메라로 성취해냈다.

 

브레송은 카메라의 플래시를 터트리는 것조차 삼갔다. 그 행위는 , 지금 당신을 찍고 있다는 매우 공격적인 선언이고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피사체가 카메라를 의식하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가 아니라 의도되거나 왜곡된 사진이 찍히게 된다는 것을 브레송은 경계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내면의 침묵을 추구한다. 나는 표정이 아니라 개성을 번역하려고 노력한다.” 브레송의 말이다. 사진작가나 시인이나 결국 사물을 응시하는 남다른 시선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 심미적 시선이 소거된 천편일률로는 사진이든 시든 예술이 되지 않는다.

 

시인은 보통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견자다. 그리고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늘 길 위에 서 있는 자이다. 문인수 시인이 꼭 그렇다. 그는 끝없이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거기서 문인수의 시는 태어난다.

 

시인은 지금도 폈다 접었다 하는 폴더 폰을 유지하는 아날로그에 가깝지만 그는 누구보다 번득이고 초점을 잘 맞추는 성능 좋은 눈을 가졌다. 그 눈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축축하고 그늘진 곳이다. 시인은 일상에서 우리가 애써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펼쳐 보인다. 그의 시는 생활 둘레에 널린 것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며 해석이다. 존재의 실상이란 환한 빛 속에서가 아니라 그늘과 적막 속에서 그 모습을 오롯이 드러낸다.

 

11.

일찍이 시인은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설파한 바 있다. 선언20087시집 배꼽시인의 말공식적으로 밝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 그리고 사람의 반은 그늘이다. ‘,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 ‘사람 구경은 또한 연민의 저 어둡고 습한 바닥내가 엎질러놓은비릿한 사람의 냄새를 맡는 일이다. 시인은 이처럼 다양한 삶의 무늬에서 사람의 냄새가 배어있는 사람의 절경에 이르고자 한다.


그 말은 풍경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너무 번쩍번쩍하거나 모범적이거나 곧은 길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시의 통로로 들어오기 힘들다. 이번 동리목월문학상을 안겨준, 데뷔 30주년에 출간한 열한 번째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명랑한 이야기는 왜 시가 잘 되지 않는가."라고 중얼거리며 묶었다고 한다. 명랑성도 시가 되기 곤란하다면 남는 것은 <배꼽>에서와 같이 구부정하고 쭈글쭈글한 것들, ‘하나같이 궁핍하고, 가련하고, 지리멸렬하고, 그런데도 아프게 아름다운이야기나 사물이나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 존재의 바닥과 뿌리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삶의 진경이 보이고 사람의 절경이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곧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고 가는 '명랑성'의 세계였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라는 인식에 가닿으며 삶의 참모습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그 바닥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이자 그 허공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나희덕, 추천사)로서, 그 고요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사유를 독자들에게도 선사하는 것이다. 인생은 홍어처럼 쓰지만, 그 쓴맛 속에도 즐거움과 쾌락과 명랑함이 깃들어 있다.


12.

문인수의 시는 매우 독자적이고 독보적이다.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읽는다 해도 조금만 유의해서 그의 시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작품임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으리라. 시인에게 글이란 어떤 정신의 뿌리와도 같다. 그의 시적 에너지는 무엇에서 비롯하는가. 골똘한 명상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날렵할까. 그의 남다른 개성, 독특한 울림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툭툭 끊기는 듯 다시 이어지는 그 가락의 정조는 또 무언가. '작가론'이란 그런 비밀을 밝혀주는 것일 터인데, 나로서는 자신이 없는 부분들이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시인이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으로 박용래를 꼽았다고 하니, 시의 어느 부분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시풍으로는 소월이나 백석과도 닿아있고 목월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로 어느 인터뷰에서 칭찬에 고마워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자기 것의 시를 써라. 이 버릇은 박용래. 김소월. 박목월 세 사람의 시집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를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냐는 멍청한 질문에 그는 꽤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답했다. “일상 속에서 하루 한 가지 대상에 대하여 고민하기, 어떤 대상에 대하여 시비걸기, 딴청부리기, 상황. 사건. 인물. 이야기에 대하여 유심히 들여다보기, 그리고 이런 것들을 반드시 노트에 메모할 것이는 곧 시인의 시작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시작의 동기는 무엇보다 재미, 즉 흥미로움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미없으면 시를 안 쓴다고 했다. 시인이라면 언제라도 능수능란하게 시를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재미없는 시를 억지로 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면, 가령 시보다 돈이나 자리 등이 좋아 보이면 오던 시도 오지 않는다. 안 오면 못쓰고, 그럼 쓸 때까지 기다릴 밖에. “사물의 새로움에 대해 적어보겠다는 욕망!”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욕망!” 시인은 또 노력이 시인을 만드는 게 아니고 기질이 만든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를 한편 탈고하면 다시는 시를 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시에는 전매특허 같은 시어들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6시집 !에서 오줌발을 길고 긴 뜨신 끈으로 표현한 것처럼 그의 다른 시에도 오줌발은 뜨신 끈인 것이다. 이미 제4시집 홰치는 산오줌연작에서도 당시 돌아가시고 없는 아버지와의 혈육적 연대감을 '길고 긴, 뜨신 끈'이라는 매우 개성적이고도 정감 짙은 표현을 통해 효과적으로 부각시킨 바 있다.

 

13.

시인의 아호가 달북· 초전· 묵단’ 3개나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하는 것은 달북으로 대표시 '달북'을 사랑하는 팬들이 '달북 선생'이라 불러준 데서 기인하였다. 고향 성주군 초전면에서도 하나를 취했다. 동네 지명의 한자를 좀 바꿔 '초전(艸傳)'이라 사했다. 마지막 게 찡하다. 1910년생 99세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함자 조묵단에서 성은 떼어버리고 이름인 '묵단(默丹)'을 자신의 호로 품었다. 묵단, 붉은 침묵이란 뜻이다. 어쩌다 한잔 마시게 되는 막걸리 기운이 그의 눈가로 몰려와 '묵단(노을)'처럼 묻어난다.

 

시인은 수년 전 술을 끊었다. 식사자리에서도 소주는 예의상 한잔 받아놓는 시늉만 한다. 막걸리는 한 잔을 음료삼아 조금씩 나누어 입술을 축일정도의 주량이다. 잘 끊어질까 반신반의했던 50년 연분의 흡연도 끊어버렸다. 술기운을 잃으니 노래방에서 눈감고 18번부를 기분도 영 아니고 그럴 일도 잘 없거니와 요즘은 아예 음주가무가 시큰둥하다. 돼지국밥을 좋아하고 돼지고기 수육이 그에게는 가장 사치스러운 음식이다. 한 달에 한번 성주를 고향으로 둔 시인들과 만나서 저녁을 먹는 곳도 순대 국밥집이다.

 

식당에 가면 등을 기댈 안락한 구석을 먼저 찾는다. 그에게는 허름한 시골 장터국밥집이 체질이다. 갈수록 반듯한 공간보다 이지러진 골방·구석자리가 좋단다. 구석에 붙은 거미줄과 송판 의자의 옹이도 그에겐 시적 왕건이 될 때가 있다. 다른 건 다 마다 않는데 그도 기피음식이 있다. 생선류는 전반적으로 선호음식이 아니지만 특히 벌건 생선매운탕은 입에 대지 않는다. 그저 입맛 때문인지 근거 없는 어떤 소신이라도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오래 참고 봐주며 살아온 그의 부인 전정숙 여사께서는 시인에게 바라는 세 가지 소원이 있다. 그 첫째가 금연인데 그 부분은 이미 해결이 되었다. 둘째가 나란히 성당에 가는 것이다. 부인은 9년 전 문학상 상금 3천만 원 가운데 물경 1천만 원을 뚝 떼어 감사헌금으로 바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함께 손잡고 성당에 열심히 나가는지 어쩌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필자의 처지 역시 좀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사유의 색채는 불교적이다. 심지어는 그의 시에서 무속이 느껴질 때도 있다. 셋째 소원이 문학 활동 열심히 해서 문학상도 많이 타는 것이란다. 두 번째 사항만 잘 이행한다면 얼추 전정숙 여사의 소원은 다 이뤄진 셈이다.

 

시인은 6시집 !를 낸 이후 개별 살림 형편이 다소 나아졌다. 시편마다의 완성도에 집중한 좋은 시집으로 독자에게 알려진 탓인지 6쇄를 찍었으며, 2008년의 7시집 배꼽은 문학성에 중점을 둔 시집인데도 일반 독자들의 성원으로 7쇄를 찍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인세도 좀 들어오고 미당문학상 상금에 더하여 초청강연, 심사 등으로 얼마간의 현금이 확보되어 부인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야금야금 용돈을 빼 쓸 수 있었다. ‘2008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돼 금메달 1냥을 받아 아내에게 넘긴 일도 있다. 1975년 결혼이후 지금까지 시인을 뒷바라지하며 불평 없이 가정을 지켜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에 눈시울이 붉게 물든다.

 

그는 동료 선후배를 망라하여 경계와 격의가 없다. 그를 시인 중에 가장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형님!’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나이가 20살 정도 차이가 나는 한 시인에게서 형님소리를 들었다면서, 그는 그것을 따 먹었다라고 표현했다. 전국 방방곡곡 그를 불러주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응하여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 늙어가는 그의 육신은 내키지 않은 일은 사양하고 분별토록 한다. 이를테면 그의 늙음은 자리를 빛내달라고 하는 요청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명한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14.

이번 시집에 놓인 시인의 말을 주목한다. “열한 번째 시집이다. , 이거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시가 아니었으면 도대체 무엇에 기대살 수 있었을까 싶다. ‘욕심이란 말은 밉상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에겐 시 쓰기의 큰 동력이었으니 뭐 해롭진 않았다. 그동안, 그러니까 2003년인가 내게 컴퓨터가 생긴 후 지금까지, 나의 컴맹 사정을 해결해 작품 활동을 가능케 해준 아들 동섭, 딸 효원에게도 이번기회에 고맙다. 참 수고했다는 말 전한다.

 

대수로울 것 없는 마지막 한마디에 순간 울컥해졌다. 이전에 종종, 그러나 성심성의껏 아내에 대한 헌사는 표해왔지만, 자식들 이름을 호명하며 고마움을 전하기는 처음이다. 시인은 9년 전에도 이만하면 됐다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그 레토릭의 오해로 사소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시인은 드러내놓고 이제 다시 시작이라며 각오를 다진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는 평생 시를 놓지 않았고 장차에도 그러리라. ‘폐경기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나. 관성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달리 겸손을 뜬들 어떻고 욕심을 부린들 무슨 상관이랴.

 

뉘앙스는 다르지만 목월선생도 비슷한 말을 언급한 일이 있다. “살다 보면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이 매너리즘에 빠진 때라는 걸 명심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목월의 이만은 모자람 없이 마음이 흡족하다는 의미의 만족이고 자칫 자만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함을 뜻하는 자족과는 얼마간 다른 개념이다. 문인수는 그 자족에다 겸손을 덧대었다. 언젠가 문인수 시인도 퇴고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뜻으로 말했던 섣부른 자기 감동이 자기 함정일 수 있으니 자기검열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시인은 이제 모든 물욕에서 비켜서 있으며, 더구나 번잡스러운 출세로부터는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다. 자신이 설령 시의 물류를 멈춘다고 해서 세상의 누구 하나 불편해 하거나 망할 사람도 없다. 스스로 다만 적막강산, 허망할 뿐.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시를 쓸 때만 자신이 꽤 그럴 듯해 보이는 사람이다. 그럴 때 자신의 마음이 모처럼 깨끗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 더불어 자신의 시를 통해 영혼의 쓸쓸함을 달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뒷모습을 보여야 할 순간이 언젠가는 그를 찾으리라. ‘세월이 가면 더 늙을 것이고, 내 시에 김이 빠지듯 긴장이 풀리면 그때는 시를 그만 쓰라고 말려 줄 후배까지 정해져 있다.’고 한다. 독자를 위해서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장해제를 자처하겠노라고 했다. 시인의 초기 시가 모성 고향회귀를 담았다면, 최근엔 삶의 비애와 연민의 기슭을 훑고 있으며, 아마 마지막 시적 주제는 '삶과 죽음'에 가 닿으리라. 사색의 뒤란이 고즈넉해질 것이다.

 

그가 인도소풍에서 목격한 소똥으로 빚는 일인분의 연료, 인도 사람들은 평생 자신이 죽으면 태울 장작을 하나씩 모으며 살더라는 말씀. 새기며 용서를 구하리라. 그런데, 시인에게 있어 그 자기용서란 곧 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나 다시 시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 쓰는 일, 아직은 이 짓만이 사는 일 중에 가장 재미있다고 한다. 그래서 쓰고 그것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뿐이다

 

어느 노정치인의 말했다는 소망처럼 서쪽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그의 모습이 설핏 보인다. 문인수 시인은 이미 그 자신이 묵단처럼 붉은 노을이 되어 우리가 바라보는 서쪽하늘에서 어쩌면 시가 되지도 않을, 시 너머의 절경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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