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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정록

향기로운 재스민 2017. 3. 7. 17:20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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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이정록 시집 / 창비시선 404 / 창비(2016.11.04)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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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 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 가시나무 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것들 때문에.

 

 

 

 

물뿌리개 꼭지처럼

이정록

 

물뿌리개 파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렇듯 묵직해져야겠다고.

좀 흘러넘쳐도 좋겠다고.

 

지친 꽃나무에

흠뻑 물을 주며 마음먹는다.

시나브로 가벼워져야겠다고.

텅 비어도 괜찮겠다고.

 

물뿌리개 젖은 통에

다시금 물을 받으며 끄덕인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고개 숙여 인사해야겠다고.

 

하지만, 한겨울

물뿌리개는 얼음 일가에 갇혔다.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주뼛주뼛, 출렁대기만 한 증거다.

 

얼음덩이 웅크린 채

어금니 목탁이나 두드리리라.

꼭지에 낀 얼음 뼈,

가장 늦게 녹으리라.

 

 

 

 

영혼의 거처

이정록

 

개구리의 눈은 쌍무덤이다

저승을 열었다 닫았다 이승 쪽에 긴 혀를 내민다

오뉴월에 상을 치러본 사람은 안다 곡비哭婢의 무덤이다

등에는 산판 작업복을 배에는 상복을 지어 입었다 

 

개구리의 영혼은 뒷다리에 있다

넓적다리의 무게가 없다면 물 밖으로 눈을 내놓을 수 없다

먼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가, 물밑 하늘에 배를 대고

구름의 능선을 넘는 상여처럼 비스듬하게 떠있다

뒷다리에서 얼이 빠져나가면 수장水葬이다

상복이 하늘 쪽으로 뒤집힌다 

 

사람의 영혼도 머리나 심장에 있는 게 아니다

허벅지에 있다 위엄 있게 죽는 게 소원이지만

병실에 눕혀진 채 자신의 눈자위에 무덤을 파는 사람들

나날이 솟구치는 사성莎城*, 침상 머리맡 좀 올려달란 말과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남은 열 마디 가운데에 여덟아홉이다

귓구멍이며 혀뿌리까지 구름이 몰려들건만

새 다리를 허우적이며 바깥세상에 시비도 걸고 싶다 

 

침대 좀 세워 줘!

꺼져드는 묘혈墓穴을 링거 줄이 잡아당긴다

수액이 스미는 만큼 가라앉는 뒤통수, 이장移葬한 무덤자리처럼

베개도 쉬이 꺼진다 땅땅했던 영혼이 졸아들기 때문이다

등짝 어디께로 운석이 떨어진다 화상이 깊다

등창燈窓, 부화의 실핏줄이 번지기 시작한다

뒤통수가 어린 새의 부리 같다

 

세웠던 침상을 뉘고, 야윈 새처럼 등을 보이며 엎드린다

비상을 도우려는 의사와 간호사의 흰 날개깃이 바빠진다

죽음은 영혼을 부화시키는 일, 허벅다리에서

배까지 올라온 영혼의 새가 머릿속으로 치고 올라온다

이윽고 숨이 멎는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흰 깃털이 스르륵 덮힌다

수평을 잡고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구름장에서

다리가 긴 빗줄기가 내린다 

 

장례식장 사층, 신생아실에선

겨우 발가락만 내민 올챙이들이 물장구를 친다

작은 주둥이가 햇살에 마르지 않도록

탯줄의 이똥이 천천히 떨어진다, 강보에 누워

다리를 들고 꼼작인다 첫 걸음마는 날갯짓을 닮으리라

발가락 끝마디에 물방울 추를 매달고

허공에 걸음마를 내딛는 어린 영혼들

     *사성莎城 : 묘혈墓穴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둘러막은 둔덕.

 

 

 

 

새표

이정록

 

 

不의 첫 획, 一은 하늘이다.

하늘 아래 화살표 모양은

새의 양 날개와 꽁지깃을 본떴다.

不이란 한자엔 하늘 복판에 점을 찍는 새가 있다.

사랑만으로 솟구쳐 오르는 철부지 날갯짓이 있다.

하늘만 보는 싹눈에게도 새가 안 보인다.

아니 보여서, 아니 不이다.

화살표라는 피 묻은 이름을 버리자.

가서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아니라

둥지로 날아오는 새표라 부르자.

하늘의 젖꼭지 쪼러가는 하늘새표라 하자.

새표를 따라가면, 아니야! 그게 아니라니까!

그간 내팽개친 새털구름을 만나리라.

눈 치켜뜨고 손사래 칠 때마다 쇠구슬로 녹스는 새알들

다시 품게 되리라. 너는 죽고 나만 살아야 한다는

화살표는 버리자. 화살표 끝자리엔 주검이 있다.

까마귀가 있다. 구더기의 역사가 있다.

쌍꺼풀 아름다운 파랑새표라 부르자.

하늘의 꼭짓점은 새의 부리가 찍는 것,

움켜잡았던 허공마저 풀어놓고는

노래만 물고 오는 아침새표가 되자.

 

 

 

 

가슴우리

이정록

 

 

     빈집을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말이죠, 기둥에 개를 묶어두는 거예요. 개는 외로움만큼 뒷다리를 버티겠죠. 그때마다 빈집도 안간힘으로 목줄을 잡아당기겠죠. 목줄 밖으로 튕겨나가는 밥그릇 따라 집 한채를 끌어당기는 긴 혀. 한쪽으로만 쏠려 더 쉽게 무너질 거라고요? 그러니까 며칠씩 돌려 매야지요. 겨울이라고 남쪽만 좋아하지는 않으니까요. 그 사람도 노을 서린 쪽문으로 떠났으니까요. 빈집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기둥이며 서까래를 컹컹 꿰맞추겠죠. 내친김에 북쪽 기둥엔 염소도 옭아맸어요. 독촉고지서 받고 한숨 쉬던 자리, 막내가 가출했을 때 줄담배를 피우던 대문 쪽 굽은 기둥에도 옮겨 매었죠. 빈집은 하루하루 힘이 세졌죠. 듣고 있나요? 그대가 떠난 뒤 나도 빈집이 되었죠. 정수리에 말뚝을 치고 떠난 당신, 저도 꼼짝없이 힘이 세졌죠. 당신 가슴우리엔 무엇이 묶여있나요. 어떤 짐승이 폐가처럼 울고 있나요. 빈방에 걸린 가족사진이 아랫목 눈물자리를 굽어보듯.

     *가슴우리- 가슴안을 둘러싸는 뼈대. 허파와 심장 등을 보호함.

 

 

 

 

코를 가져갔다

이정록

 

     누구나 죽지. 똥오줌 못 가리는 깊은 병에 걸리지. 어미에게 병이 오는 걸 걱정 마라 개똥 한번 치워본 적 없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 지극정성으로 몸과 마음 조아리다보면 감기가 올 게다. 감기가 코를 가져가겠지. 냄새만 맡을 수 없다면, 넌 내 사타구니에서 호박꽃이나 고구마 밥을 꺼내어 신문지에 둘둘 감쌀 수도 있을 게다

 

 

     나 때문에 독감에 걸렸구나. 삼우제 끝나면 씻은 듯이 나을 거다. 잠시 달아났던 코는 새것이 되어서 황토무덤 앞에서 킁킁대겠지. 네 콧구멍에서 새봄이 시작될 거다. 그게 회춘이란다. 가족이란 언제든지 코를 주고받는 사이지. 새끼가 여럿이다 보니 어미코는 누가 베어간 것 같구나. 먼 훗날 너도 이렇게 말하렴. 잠시 코를 베어갔다가 돌려주겠노라고. 곧 봄이 돌아올 거라고

 

 

 

 

내가 좋다

이정록

 

 

온천탕 귀퉁이

노인의 왼 어깨에 터를 잡은 초록 문신,

참을 ‘忍’은 漢字인데 ‘내’는 한글로 팠다

문신 뜨는 이도 ‘耐’란 한자는 쓸 줄 몰랐을까

한국과 중국은 이웃이니까 한 글자씩 선린외교하자 했을까

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면 두 글자의 나이터울은 몇 살일까

등을 밀어드리는 내내 입술 근질거린다 민망하게 터진 웃음의 솔기

환갑 넘도록 얼마나 많은 키득거림이 그의 얼굴을 구석으로 돌려놓은 걸까

혀뿌리에서 솟구치는 끝없는 치욕을 잘디잘게 토막 쳐서

심장 속 칼날에 잘 벼렸을까, 돌아보니

‘忍’은 비누거품에 들고 ‘내’만 훌쩍이고 있다

 

 

내는 깡패 아니다

내는 이런 걸 새기고 싶지 않았다

내는 한글도 모른다 내는 한 달에 한번 목욕탕 오는 게 좋다

내는 ‘내’ 때문에 웃어줘서 고맙다 몸뚱이가 보물이다

‘내’가 없으면 누가 내를 쳐다보겠나

옷 입고 나가면 내는 다시 쓸쓸한 노인네다

젊은이들이 간혹 밖에서도 내를 알아보고 웃는다

내는 그게 비웃음으로 안 들린다 내는 저녁 같은 사람이다

그늘이 어둠이 되지 않게 나지막이 살아 온 사람이다

내는 땅 한 평 없는데 ‘LH’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내는 아이들이 별명을 불러줄 때가 그중 행복하다

‘내’ 할아버지다! 꼬마들이 윗도리를 벗어보라고 보챌 때는

팔뚝만 보여준다 내는 국민할아버지다

와, 알통이다! 내는 매일 팔굽혀펴기 한다.

‘내’가 내를 살린다

내는 ‘내’가 참 좋다

 

 

 

 

사루비아

이정록

     신문지 위로 소나기가 쏟아진다. 사철 입는 겨울 코트가 묵직해진다. 스무마리 남짓한 비둘기와 맨땅 겸상하는 나발소주가 물먹은 외투를 가로등에 묶어 비튼다. 남의 집 첫술부터 이놈에 먹물이 문제였지. 질질 끌고 가서 에어컨 실외기에 팔자를 펴 말린다. 그림자도 먹물이네, 덩치 큰 송풍기도 어깨를 들썩이며 구시렁댄다.

 

 

     신문도 급수가 있어, 욕 많이 얻어먹는 신문일수록 따듯하지, 면수가 많잖아. 미끈미끈한 광고와 동침하려면 신혼방 꽃무늬 이불처럼 칼라라야 되지 않겠어. 금상첨화 원앙금침이라도 새벽에 술 깨면 추워야. 중앙은 아예 안 써, 갓난이 이불처럼 쪼그마해서 말이여, 하여튼 안마당에 기차 들어오고 옥상에 백화점 들여놓고 사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니까. 사루비아 꽃술이 그렁그렁 맞장구치려다가, 제 눈물 속 먼 하늘이나 들여다본다.

 

 

     소나기 쥐어짠 손바닥에 사루비아 피었다.

     붓 빤 먹물 양동이 시원하게 엎어버린 서녘 하늘도 오랜만에 손금 환하다.

 

 

 

 

은방울꽃

이정록

 

 

     아버지는 안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서 식구들을 하나하나 불렀다. 노모에게 미안하단 말 올리고선 빗줄기 속에 서계셨다. 우리는 마루 끝에 나란히 서서 차렷경례를 올렸다. 아버지 이제 오세요? 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어머니가 서열을 잘못 찾으면 막내 옆 끝자리에 설 때까지 야간 점호는 계속 되었다. 왜 내가 끝자리래요? 어머니가 댓발 입술을 내밀면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당신이 막내보다 귀엽잖아. 찡긋, 눈짓을 날렸다. 우리는 그제야 골방으로 기어들었고 어머니의 입술은 은방울꽃 가장 작은 봉오리가 되어 취한 아버지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드리는 거였다. 그런 날 꿈결엔 막내를 임신한 늙은 어미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는 것이었다.

 

 

 

 

간장게장

이정록

 

 

별명은 밥도둑이다. 등딱지는

열 번 넘게 주조鑄造한 이각반합二角飯盒이다.

밥 한 그릇 뚝딱! 게 눈 감추듯 치워버리는,

이 신비한 밥그릇을 지키려 집게손을 키워왔다.

손이 단단하면 이력은 두툼하다.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역사다.

양상군자梁上君子와 더불어 반상군자上君子

동서고금의 도둑 중에 이대 성현이 되었다.

바다 밑바닥을 벼루 삼으니 먹물마저 감미롭다.

음주고행으로 보행법까지 따르는 자들이

발가락까지 쪽쪽 빨며 찬양하는 바다,

내 등딱지를 통해 철통밥그릇을 배워라.

밥그릇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큰 그릇이 되려면 지금의 그릇은 버려라.

묵은 밥그릇마저 잘게 부숴 먹어라.

언제든 최선을 다해 게거품을 물어라.

옆걸음과 뒷걸음질이 진보를 낳는다.

 

 

 

 

비둘기

이정록

 

 

시청은 이사 가고 비둘기만 남았다

통보받은 바 없어 명퇴서류도 준비 못한 공무용 비둘기

차량과 민원과 서류뭉치가 떠나자 안절부절못한다

평화와 번영과 봉사가 다들 어디로 날아갔나

더 이상 공무도하가는 부르지 않으리

남은 일이라곤 옥상 난간에서 제 알을 굴려 떨어뜨리는 것뿐

사람 없는 빈 집에 둥지 틀어 무엇해! 교미도 시늉뿐이다

노른자 흰자 비둘기 똥은 박살난 제 알을 빼닮았다

명퇴서류에 박아 넣을 눈알만 붉게 굴려댈 뿐

혼신을 다해 타이핑하던 뭉툭한 부리로

마지막 공무인 양 주차선 페인트자국이나 쪼아댈 뿐

 

 

 

 

시인

이정록

 

 

몽당연필처럼

발로 쓰고 머리로는 지운다.

면도칼쯤이야 피하지 않는다.

몽당夢堂의 생,

자투리에 끼운 볼펜대를 관이라 여긴다.

뼈로 세운 사리탑!

끝까지 흑심黑心을 품고 산다.

 

 

한 사람의 손아귀

그 작은 어둠을 적실 때까지

검게 탄 마음의 뼈가 말문을 열 때까지.

 

 

 

 

시의 쓸모

이정록

 

 

모 시인의 승용차가

폐차 직전이란 걸 눈치챈 자동차외판원은

시인의 대표작과 신작시를 달달 외웠다.

시인이 오래된 만년필로 연거푸 싸인했다.

하나는 신작 시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매계약서였다.

자신의 시에 처음으로 제값을 치른 쾌거였으므로 승차감 또한 흐뭇하였다.

나 또한 시의 노복, 내 단골집 아씨는 별명이 줄똥말똥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전통을 내세워 안주 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옥편 값이 더 비싸데요!

한자漢字 어석거리는 나의 시「풋사과의 주름살」을 줄줄 외웠다.

무릎을 꿇은 채, 메뉴판의 구부 능선을 제 유방으로 덮고는

가장 비싼 메뉴에 초고추장 같은 손가락을 찍었다. 왼손으로는

브래지어 끈을 살짝 올렸다가 눈사람 목주름민큼만 끌어 내렸다.

딱 여기까지라는 듯 가슴 둔덕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안주를 살피려면, 그녀의 젖가슴을 들어 올리는 수고로움이 뒤따름으로

나는 물레방앗간 옆 산뽕나무처럼 오디 눈동자만 깜작였다.

오빠 그거! 한번 매상을 올린 그녀는 번번이 과일안주를 대동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교양미 넘치는 시낭송가였다.

자동차외판원의 애인이란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딘가에서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며 시를 외우는 애인들아.

아직도 나는, 주춧돌 메고 나가 기둥서방이라도 되고 싶다.

끝내 시의 용도폐기까지는 따져 묻지 못했지만

시 한 편이 최소한 과일안주 값은 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메뉴판이 되리라! 나에게도

뻥뻥 축포가 터지던 시의 역사가 있었다.

 

 

 

 

시론

이정록

 

 

천편일률千篇一律이라고

머리말에 써놓았다.

 

 

천 권 읽어야

시 한 편 온다.

 

 

편지봉투에 풀칠 하듯

한줄 더 봉한다,

 

 

천편을 써야

겨우 가락 하나 얻는다.

 

 

이율배반二律背反,

이천편을 쓰면

등 뒤에 눈을 단다.

 

 

 

 

경주 남산

이정록

 

 

미끄럽죠.

그런데 사람들

넘어지면서도 웃지요.

여기 모래가 그냥 모래인가요.

부처님 귓바퀴나 눈동자에서 출가한

말씀 아니겠어요

 

 

천년도 넘게

거미줄로 바랑을 꾸려보지만

술술 새어나가는데 어쩌겠어요.

슬그머니 넘어져보세요.

작은 미소 위에 살짝

무릎을 짚어요.

 

 

그봐요.

주저앉으니

산이 커지죠.

모래부처님 뜻이지요.

 

 

 

 

이정록

 

 

가장

소중한 건

 

얼씨구나

 

쉰살 아침에

쉬운 답을 얻었다.

 

 

과 씨가

삶의 얼개임을.

 

단 한 번 사랑으로도

얼씨구나.

통째로구나.

 

올 때도

떠날 때에도

 

얼씨구나.

얼씨, 한몸이구나.

 

 

 

 

성성

이정록

 

 

오줌을 누다 보고 말았다

담쟁이 이파리가 끝내 가지려 했던 것

城壁 틈바구니에 신방돌이며 맷돌이 박혀있었다

돌확이며 망주석도 어깃장 처박혀 있었다

제 집의 뿌리를 캐온 사람들

무덤만은 안 된다고 땅을 치던 사람들

담쟁이넝쿨은 한사코 지붕을 얹겠단 건가

푸른 지붕 아래에다 이승과 저승 다 들여놓고

상석에 젯밥이라도 올리겠단 건가

맷돌의 퀭한 굇구멍*이 손잡이를 가늠하는지

내 거시기를 훔쳐본다, 이란

박복한 아낙의 광대뼈 위에

돌덩어리로 쌓아올린 눈물샘인 것을

하늘만 우러르는 음펑눈, 착한 돌눈썹인 것을

담쟁이는 짐짓 초록눈썹으로 덮어보겠단 건가

망주석 하나만 양기를 모아도

맷돌의 녹슨 수쇠가 암쇠 하나만 궁합을 봐도

우르르, 말발굽소리 들려올 것만 같은데

      *굇구멍 : 창, 삽, 괭이, 맷돌 등의 자루를 박는 구멍

 

 

 

 

상추꽃

이정록

 

 

갈수록 입맛을 잃는 건,

상추 잎이 뜯겨나간 자리처럼

목젖에 쓴물이 돌기 때문이다.

명퇴하는 벗과 횟집에 간다.

상처 깊은 놈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민어 한 마리가 육탁肉鐸을 치고 있다.

 

 

수족관 유리벽을 깨버릴 거야.

죽을 놈부터 도마에 오르지, 말리지 마.

헐값에 팔리는 게 복수야, 지느러미가 찢기고

비늘이 벗겨졌으니, 이제 주둥이를 짓찧을 거야.

먼저 갈게, 죽음만은 양보할 수 없어.

 

헐어버린 등 비늘에 상추꽃이 피었다.

접시 위 꽃잎 살점들, 상추 이파리가 수의다.

스티로폼 상자의 상추 몇 그루도 명퇴 중이다.

차례차례 뜯겨나간 이파리, 지팡이처럼 키가 자랐구나.

한뼘 허공과 뿌리의 망연자실만이 남았구나

 

 

손등 위에도 상추꽃이 핀다.

상추 대궁처럼 지팡이에도 젖꼭지가 많다.

나이 들수록 손바닥에 쓴맛이 괴는 까닭이다.

소주 한 잔에 수의 한 벌, 그렁그렁

밤하늘에도 상추꽃 만발하다.

오늘만은 꽃상여다.

 


노병의

이정록

 

 

버스는 떠났네

처음 집을 나온 듯 휘몰아치는 바람

너는 다시 오지 않으리, 아니

다시는 오지 마라 어금니 깨무는데

아름다워라 단풍든 물푸레나무

나는 방금 이별한 여자의 얼굴도 잊고

첫사랑에 빠진 듯 탄성을 지르는데

산간 멀리서 첫눈이 온다지

포장마차로 들어가는 사람들

물푸레나무 그 황금 이파리를

수많은 조각달로 고쳐 읽으며

하느님의 지갑에는 저 이파리들 가득하겠지

문득 갑부가 되어 즐겁다가

뚝 떼어서 함께 지고 갈 여자가 없어서

슬퍼지다가, 네 어깨는 작고 작아서

내가 다 지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늦가을

막차는 가버렸고, 포장마차는 물푸레나무 그림자로 출렁이는데

주인은 오징어의 배를 갈라 흰 뼈를 꺼내놓는데

비누라면 함께 샤워할 네가 없고

숫돌이라면 이제 은장도는 품지 않아

그렇지만 가슴속에서 둥글게 닳아버린 저것이

그냥 지상의 도마 위로 솟구쳤겠나

그래 저것을 나는 난파밖에 모르는 조각배라 해야겠네

너에게 가는 마지막 배라고 출항표에다 적어놓아야겠네

나에게도 함께 노 저어 갈 여자가 있었지

포장마차는 사공만 가득한 채 정박 중인데

물푸레나무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며

가뭇없이 사라져도 되겠네 먼 바다로

첫눈 맞으러 가도 되겠네

 

 

 

 

우주의 놀이

이정록

 

 

천년 고목도

한때는 새순이었습니다.

새 촉이었습니다.

새싹 기둥을 세우고

첫 잎으로 지붕을 얹습니다. 

 

첫 이파리의 떨림을

모든 이파리가 따라 하듯

나의 사랑은 배냇짓뿐입니다.

곁에서 품으로,

끝없이 첫걸음마를 뗍니다.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영원한 소꿉놀이를 하는 겁니다.

이슬 비치는 그대 숲에서

고사리손을 펼쳐 글을 받아내는 일입니다.

곁을 스쳐간 건들바람과

품에 깃든 회오리바람에 대하여. 

 

태초의 말씀들,

두근두근 옹알이였습니다.

숨결마다 시였습니다.

떡잎 합장에 맞절하며

푸른 말씀을 숭배합니다.

 

 

새싹이 자라 숲이 됩니다.

아기가 자라 세상이 됩니다.

등 너머, 손깍지까지 당도한

아득한 어둠을 노래합니다.

 

 

싹눈이 열리는 순간,

태초가 열립니다. 거룩한

우주의 놀이가 탄생합니다.

 

 

 

 

몸의 서쪽

이정록

 

사바나 초원,

죽은 어미 옆에

송아지가 누워 있다

 

 

송아지는 죽어 석양을 보고 있다

어미 혓바닥은 엉덩이 쪽을 가리키고 있다

암소의 자궁이 쩍 벌어져 있다

몸의 동쪽은 언제나 생식기다

 

 

초원은 너무 넓어요

엄마 발과 제 발을 잇대어 방을 만드세요

여기 작은 방에 들어와 젖을 짜세요

제 부드러운 가죽도 드릴게요

 

 

눈이 커다란 사내가

죽은 암소의 젖을 짠다

몸의 북쪽은 등짝이다

아기가 업힌 곳이다

마른 젖 보채던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

 

 

사람의 몸이 성전인 까닭은

기도의 시간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두 손을 맞잡기 때문이다

몸의 남쪽은 손바닥이다

 

 

울음소리가 없다

송아지도 어미 소도 눈물 짜지 않는다

붉은 눈망울만이 몸의 서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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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세랭게티 초원에 우기가 찾아왔습니다.

짝짓기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이쪽저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을 쓰려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동물의 왕국」이란 티브이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의 최선이 떠올랐습니다.

빗방울의 최선이 떠올랐습니다.

땅속 어둠의 최선이 떠올랐습니다.

 

최선을 다한 헐떡거림과

최선을 다 한 자신의 꼭짓점을 최선을 다해 핥고 있는

수사자의 빨간 혀가 떠올랐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그의 방심을 최선을 다해 빨아 먹는 파리가 떠올랐습니다.

 

최선을 다해 흰 살갗을 내보이는 종이와

최선을 다해 구겨졌다가 최선을 다해 뼈마디를 맞추는 종이를 바라봅니다.

종이의 모서리에 뿔을 들이밉니다.

 

최선을 다해 모니터의 커서가 명멸을 반복합니다.

별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2016년 시월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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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詩集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해설 ] -

서쪽, 또는 생명의 母神으로서의 상징적 시의식

김상천

 

 

     1

 

     시인 이정록!

     그의 시적 주제는 자연과 인간의 ‘동거’다. 첫시집『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이후『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제비꽃 여인숙』등 초기 시집에서 자연과 인간은 조화롭게 병존한다. ‘벌레’와 ‘집’,‘풋사과’와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과 ‘셋집’, ‘제비꽃’과 ‘여인숙’이 서로 등가等價를 이루며 아름답게 물들어 있다. 이런 관계는『의자』『정말』둥 후기 시집에서도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면서 깊고 넓게 보편의 강물을 이룬다. 특히 몸이 불편한 노모의 말을 빌려 “허리가 아프니까/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의자」,『의자』문학과 지성사 2006)라고 전하는 하나 된 의미는 그악한 자본에 치여 살아가는 현대의 소시민들에게 위로와 치유 이상의 동시대적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요컨대 그는 ‘비근대적’ 시인이다.

     근대 이래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는 철학적 균열이라는 철퇴를 맞았다. 인간만이 본질적 가치를 지니고 자연 등 다른 존재는 도구적 가치만을 갖는다는 이른바 ‘인간중심주의’가 지배적으로 관철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정록의 시가 ‘생태시’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면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으면서 두 대상의 공존을 줄기차고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이 일시적인 시적 충동의 소재가 아닌 지속적인 ‘형상적 사유’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여기, 그의 시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첫 단추를 열어보자.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서시」(『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1994)전문

 

 

     ‘마을’과 ‘나무’는 곧 인간관계와 자연계를 상징하는 기호다. 기호학자 퍼스의 말대로, 기호가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을과 나무, 인간계와 자연계, 달리 말해 ‘말’과 ‘사물’의 상거(相距)와 길항에 대하여 말하면서, 가까울수록 흠집이 많고 “내 몸이 성하다”는 반성에 비추어볼 때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자연만의 노래도 아니고 인간만의 노래도 아닌,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놓인 미묘한 거리, ‘미적 절제’의 문제임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이번 시집에서 시인 이정록이 펼쳐놓은 말과 사물의 관계는 어떠한가.

 

 

     2

 

     이정록의 시가 남다른 시적 매력과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우선 비유 덕이다. 비유는 곧잘 아름다운 여성에 견주어질 만큼 매혹적이다. 임기웅변에 능한 항해사 오디세우스를 유혹에 빠뜨린 것도 아름답고 매혹적인 세이런에었다.

 

 

     자! 이리 오세요, 칭찬이 자자한 오디세우스여, 아카이오 이족의 위대한 영광이여!

     - 호메로스『오디세이아』

 

 

     이렇게 부드럽게 파고드는데 안 넘어갈 수 없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지혜롭게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리스 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위대한 영광”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영웅 찬가들에 바쳐진 비유가 한송이 아름다운 꽃다발이었음을 본다. 즉, 고대의 비유가 한송이 아름다운 꽃다발이었음을 본다. 즉, 고대의 비유는 말과 사물의 거리가 상실된 맹목의 언어였다. 다시 말해 고중세의 비유는 대상을 수식하는 맹목의 눈먼 시인, 사제가 바치는 노예의 수사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타고난 재능으로서의 비유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노예제는 정의’라던 그의 수사학을 떠받치는 곰털 장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정록의 시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비유는 이와는 좀 다르다. 하나의 수사로서의 비유가 그의 시에서는 등가의 원리에 기초한다. 그리하여 문학예술의 본령인 비유(metaphor)는 나를 넘어(meta) 너에게로 가는(phor) 아름다운 만남의 길이 되고 있다.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젖어 있네

 

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이

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

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

나도 매일 바라본다네

 

해마다 나는

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해지는 쪽으로」전문

 

     굳이 “해 지는 쪽으로/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는 시적 화자인 ‘나’를 가리키기 위한 보조 막대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보조’는 전래의 수사학에서 말하는 보조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에게 사물은, 아니 자연은 인간과 등가적 심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도”가 그 증거다. 그리하여 “해 지는 쪽으로/고갤 숙이는 해바라기”는 낮은 곳, 소외된 인간을 강하게 환기하는 비근한 기호로 기능한다.

     비유가 이정록의 시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인식론의 문제, 곧 ‘삶’과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이미 답은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와 사고는 분리될 수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것들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전문

 

     우선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살 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그가 울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세상은 살 만하기도 하지만 또 살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어야 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시를 써야 한다는 자의식과 마주하면서,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시심을 낚아 올리는 ‘검은 우물’이자 창조의 두레박임을 확인한다. ‘검은 담즙’같이 어두운, 젖은 인생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그로 하여금 맹목적 현실과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멀리할 수도 없는 시적 변증법을 낳게 하는 것이다. 즉, 이 어쩌지 못하고 마는 자신을 시적 대상으로 삼는 존재론적 시관을 지닌 시인이라기보다는 “망망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수 집단을 대상으로 삼는 계도론적 시관을 지닌 시인임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정서, 감정 구조로 자리잡은 그의 시풍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우선은 역사에서 소외된 민중을 ‘님’으로 호명해낸 한용운의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인이 되겠다고 맘을 먹은지 3년, 대학교 2학년이 되도록 시집이라고는 『한용운의 명시』한권뿐이었다”(「글짓기 대표선수」,『아버지학교』열림원2013)는 그의 고백을 통해 볼 때, 만해의 정신은 분명 골수에 박혔으리라. 또한 시인이 되겠다고 작심하고 처음 공부하던 시절,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라던 정희성의「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상호 교감이 얼마나 저린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지,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동거하며 세계의 진실을 공유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터득하게 되었음을 본다. 그리고『관촌수필』을 비롯한 일련의 농촌소설을 통해 고욤나무, 싸리나무, 개암나무, 화살나무, 소태나무 같은 것들, 즉 ‘민중의 나무’에 대한 집요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이문구와의 교제가 무엇보다 크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3

 

     이정록의 시에서 비유가 단순하게 대상(원관념, 이데아, 실체, 주인)을 수식하는 보조 수단으로 기능하는 노예의 수사법이 아니라 ‘벌레의 집’처럼 자연과 인간의 교호(交好)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문명의 차원에서 볼 때, 그가 서구 전래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을 ‘찢는’ 비근대적 사고를 지녔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절묘한 시를 마주하는 즐거움에 젖는다.

 

 

느티나무는 그늘을 낳고 백일홍나무는 햇살을 낳는다

 

느티나무는 마을로 가로 백일홍나무는 무덤으로 간다

 

느티나무에서 백일홍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

-「생전문

 

     여기서 우리는 서양철학이 전통적으로 실체라는 불변의 고정된 원본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허상이 되고 말지만 이 원본을 부정하고 찢는 순간 사실은 그대로 진상이 될 수 있다는 형상적 사유의 진수를 맞본다. 삶은 곧 죽음의 한순간이며, 죽음 또한 거대한 생명의 한 고리일 뿐임을,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끝없는 반복의 연속이며, “그 반복으로부터 어떤 작은 차이, 이형異形, 변양變樣들을 추출해내고 있”(질 들뢰즈『차이와 반복』)는 것임을 본다.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면서 삶과 죽음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의 연속되는 차이이자 순환이며, 욕망으로 끊임없이 어딘가로 흘러갈 뿐임을 안다. 삶은 곧 죽음이다. 모든 것은 지금 모니터의 커서처럼 순간순간 명멸해갈 뿐이다.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다시 이형, 변양 운동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리하여 느티나무 그늘은 마을로 가고, 백일홍나무 햇살은 무덤으로 가는 이치가 있다.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순화한다는 회귀적 사유를 우리는 이미 마주한 바 있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하고 우리 자신도 그러하다는 것, 우리가 우리와 아울러 만물이 이미 무한번 존재했다는 사실을

            -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아니 느티나무와 백일홍나무가 그런 것처럼 만물이 무한 반복하고 회귀하는 과정은 이정록의 짧은 시로 다시 피어나 파란만장한 나비로 재생하기에 이른다. 애벌레가 되었다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로 환생하기까지, 아니 다시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기까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한용운「알 수 없어요」)되는 것처럼, 성장은 곧 죽음에 다름 아니고 죽음은 또한 성장에 다름 아니다.

 

 

느티나무=그늘=마을=파란=나비

백일홍나무=햇살=무덤=만장=나비

 

 

     삶과 죽음을 하나의 등가를 이루는 원환적 고리로 파악하는 그에게 생사는 하나의 진상일 뿐이다. 그가 이렇게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 운동화는

대문 옆 담장 위에 말려야지

우리 집에 막 발을 내딛는

첫 햇살로 말려야지

 

어른들 신발은 지붕에 올려놔야지

개가 물어가지않으면 되니까

높고 험한 데로 밥벌이하러 나가야 하니까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셨지

북망산천 가까운 사랑방 툇마루에

당신은, 당신 흰 고무신을 말리셨지

 

노을빛에 말리셨지

어둔 저승길, 미리 넘어져보는 거야

달빛에 엎어놓으셨지

저물어도 거둬들이지 않으셨지

 

마지막은 다 밤길이야

젖은 신발이 고꾸라져 있었지

-「젖은 신발」전문

 

     어조가 시적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암시한다고 볼 때,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어말어미 ‘~지’는 확인서술형에 해당한다. 확인서술형은 말하는 이가 대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시사하면서 자신이 아는 바를 확고히 다지는 서술 형태 아닌가. 그리하여 “젖은 신발”은 “마지막은 다 밤길”이라는 넉넉한 자득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정록의 시가 일상의 그늘진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코 어둡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 결코 같은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르지도 않다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서쪽’이다. 상징은 마치 ‘북극성처럼’ 모든 것이 그것을 위해 도는 무엇이 아닌가. 한용운의 시가 ‘님’을 끼고 돌고, 이문구의 소설이 ‘쓰러진 왕소나무’를 맴돌듯이, 이정록의 시는 ‘서쪽’을 중심으로 돈다.

 

 

사바나 초원

죽은 어미 옆에

송아지가 누워 있다

 

 

송아지는 죽어 석양을 보고 있다

어미 혓바닥은 엉덩이 쪽을 가리키고 있다

암소의 자궁이 쩍 벌어져 있다

몸의 동쪽은 언제나 생식기다

 

 

초원은 너무 넓어요

엄마 발과 제 발을 잇대어 방을 만드세요

여기 작은 방에 들어와 젖을 짜세요

제 부드러운 가죽도 드릴게요

 

눈이 커다란 사내가

죽은 암소의 젖을 짠다

몸의 북쪽은 등짝이다

아기가 업힌 곳이다

마른 젖 보채던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

 

사람의 몸이 성전인 까닭은

기도의 시간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눈물젖은 두 손을 맞잡기 때문이다

몸의 남쪽은 손바닥이다

 

울음소리가 없다

송아지도 어미 소도 눈물 짜지 않는다

붉은 눈망울만이 몸의 서쪽이다

-「몸의 서쪽」전문

 

     ‘서쪽’은 그에게 하나의 강박이자 무의식이다. 그만큼 자주 반복되고 있다. 언어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적 구조를 읽어낸 라깡을 참고해보자. 그는 불멸의 저서 『에크리』에서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언명함으로써 언어학자 쏘쉬르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를 창조적으로 용해시켜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개념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정록의 시에서 “몸의 서쪽”을 비롯하여 “석양” ‘죽음’ “붉은 눈망울” 등의 서쪽과 이 서쪽을 암시하는 다양한 이양, 변양 이미지들을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욕망과 언어적 기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왜 해가 뜨는 동쪽도 아니고 따뜻한 남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쪽도 아닌, “붉은 눈망울만이” 있는 서쪽을 주목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이 무의식적 욕망의 심부와 기저에 놓인 지하 세계가 가리키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서쪽’이 ‘해뜨는 곳’이 아니라 ‘해 지는 곳’을 상징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젖은 인생들의 붉은 노을, “붉은 눈망울”들이 머무는 곳, 그곳은 바로 ‘그늘’의 세계이고, 신중세라 칭하는 암흑 같은 ‘지하 세계’이다. 아무리 노력해보다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수많은 ‘미생’들의 세계이고, 숱한 무명無名의 비원이 서린 세계 그 어디이다.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에 그가 이렇게 남다르게 천착하고 있는 것은 결국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수자들의 그늘과 같은 삶에 대한 심리적 경사야말로 구름에 젖고 비에 젖은 ‘풀꽃’들의 “망망 가슴”들에 대한 뜨거운 연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여기서 그가 이제 비로소 자신의 언어를, 하나의 상징을, 신전 기둥을 하나 세웠음을 본다. 그는 서쪽의 시인이라고, 한용운의 임이 ‘민족’이고, 이문구의 임이 ‘민중의 나무’라면, 이정록의 임은 바로 모든 소수 집단의 비원을 담고 있는 ‘서쪽’이라고.

 

 

     4

 

     그리고 나는 그의 비원이 다만 비장한 소원으로만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름다운 가편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본다.

 

 

五柳先生(오류선생)집 수염 짧은 쥐

鼠錄(서록)일세, 잘 지내는가?

장화도 신지 않고 蓮池(연지)에서 노닐다가

가을이 당도하야 마당가 국화 밑에서 편지를 쓰네

국향으로 연향을 밀어내려니 어찌 벗이 그립지 않겠나?

오늘도 국화꽃 그늘에서 종일 울 밖 단풍을 내다보네

이 맛이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이군

키가 작아 자꾸 까치발을 딛다보니 발목이 부어올랐네

아내는 붉은 내 발바닥이 보기 좋다고

침 묻은 수염으로 발바닥을 간질이네

발바닥이 좁으니 쥐수염붓으로 두어자 연서나 쓴다네

아기단풍 같고 홍련 봉오리 같다고 볼을 비빈다네

아내는 아마도 사산한 첫애 얼굴을 떠올릴 것이네

내외가 다 이가 상해서 마른 옥수수와 국화꽃으로 누룩을 빚었다네

물은 국화 뿌리에 작은 우물을 파서 菊英水(국영수)을 얻었다네

꼬리에 참기를 몇방울 찍어서 부인과 함께 오시게나

자네 첫사랑은 우리 집사람도 겸상할 만큼 마른 국화 향이 난다네

술상은 서쪽 툇마루에 마련할 테니 해 지기 전에 오시게

아내는 몇 번이나 도랑에 국화꽃 띄워 발바닥 닦고 있다네

갓난아이 첫 목욕 때처럼 마음 벌써 불콰하다네

댓잎이 달빛 각을 마칠 때까지

우리도 對聯(대련)이나 쳐보세

-「꽃그늘」전문

 

 

     잘 알다시피 ‘무릉도원’은 동양의 대표적인 이상향을 일컫는 문학적 상징으로,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기원으로 한다. 그 이상향인 도원이 여기, ‘꽃그늘’로 다시 태어났다.

     중요한 것은 그가 원작을 단순히 모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창작의 모티프로 삼아 개작의 수준을 넘어 멋지게 재창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작품을 이렇게 빛나게 하는 것일까. “오류선생”은 도연명이 자기 집앞에 버드나무 다섯그루를 심어놓은 데에서 그를 가리키는 별호가 되었다. 즉, “오류선생”은 도연명이자 이 시의 화자다. “수염 짧은 쥐”는 쥐 수염으로 만든 붓을 상징하는 것이니 “서록”은 문사文士로서 자신을 암시하는 기호다. 자신을 소개하는 서두에서 벌써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면서 매혹시키는 이 시는 하나의 불가해한 기호적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렇게 거창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친구의 안부를 묻고는 글 쓰는 사연을 말한다. 국화 향이 서린 가을이 되어 자연과 벗하다보니 도연명이 유유자적하게 노닐던 풍취가 생각나 벗이 그립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정취가 자연만의 풍취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석양이 어우러진 속에 삶의 그늘이 깃들어 있다는 데 있다. 정중한 초대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기쁘기 그지없는 여유 속에서도 아내는 사산한 첫애를 떠올리는 표정이 역력하고, 또 초대 상대는 한때 아내를 두고 화자와 연적 관계였다는 점을 볼 때-결코 간단치 않은 물길이 스쳐 지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간단치 않은 세월의 물길도 국화뿌리를 대서 얻은 “국영수”로 빚은 술 앞에서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한점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피어난다. 한잔의 물방울, 실로 모든 것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문명의 그릇이 빚어지고, 여기서 문화의 꽃이 피어났으며, 이것을 술로 빚어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고, 이것을 또 잉크 삼아 부글거리는 욕망의 역사를 써오지 않았던가.

     이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서쪽 툇마루”라는 사실은 우연일까 의도일까. 그는 이것을 알고 썼을까 모르고 썼을까. 나는 여기서 라깡의 말대로 의식, 무의식 중에 ‘서쪽’이라는 언어의 반복적 사용으로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감정 구조로서의 정서를, 하나의 상징적 언어 구조로서 자리잡고 있는 욕망의 형식을 본다. ‘서쪽’은 방향이자 공간이자 경물이다. 하나의 지시체이자 인간에 대한 어떤 기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코노테이션(connotation)이다. 즉, ‘서쪽’은 자연 속에 인간이 있고, 이 인간 속에 자연이 깃들어 있는 경중정景中情, 정중경情中景의 동양적 이상을 함축하는 상징어이다. 그리하여 이 “서쪽 툇마루”에서 자연과 인간이 융화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며, 인간과 인간이 화해를 나누는 아름다운 절경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영토가 비근대의 영토로 탈영토화하는 ‘서쪽’은 저 물할머니 같은 태초의 모신母神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자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이 시집에는「생」「꽃그늘」등 매우 수준 높은 미적성취를 보여주는 시가 있는가 하면「문상」「츰 봐」「궁합」「꽃은 까지려고 핀다」「바가지 권정생」「흰 붓」등 소소한 일상어가 그대로 시꽃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즐비하다.

     이런 미적 성취에도 그의 시에 ‘사회시’가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겸손으로 느껴진다. 이런 사실은 말과 사물의 미적 상거와 길항 관계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사회 현실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긴장을 눈치채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지적과는 또다르게 나는 이정록의 시세계가, 다시 말해 근대적 분리나 단절이 아닌 비근대적 만남과 연대를 함축하고 있는 ‘서쪽’이라는 상징이 결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본다.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한용운「군말」부분

 

     하나의 상징으로서, 개별적인 묘사가 아닌 보편적인 규범으로서 “해 저문 벌판에서(…)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님의 침묵』을 낳았듯이, 저 서쪽, 해 지는 들녘에서 갈 곳 몰라 헤매는 “붉은 눈망울”들이 기루어서 그의 시를 낳았음을 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확인한다. 시는 단순한 ‘물적’반영물이 아니라 시인의 개성적인 눈으로 빚어낸 ‘미적’형성물임을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서해바다, 눈물바다가 그를 낳았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