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 모음 2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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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김용택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맞춤의 감촉은 잊었지만
그 설렘이 때로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10월이었지요.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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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 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마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
김용호 붙임
섬진강
섬진강 발원지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경사면인 전북 진안 장수를 경계한
팔공산 상추막이골의 데미샘에서
발원한다.
섬진강은 유로연장 21.3km
유역면적 4,896평방 km로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3개도
11개시군을 거쳐 흐른다.
그 중에 유역면적 분포는 전라남도가 47%
전라북도 44% 경상남도 9%를 차지한
550리 물 즐기를 형성하고 있다.
진안군 백운면출발로 마령면을 거쳐 성수면을 지나
전북 임실군 순창군을 거쳐 전남 곡성읍에서
요천과 만나고 곡성군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경계를 따라 남해안의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선진강 특징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순으로
5대 강에 속하고 자연상태가 제일 잘 보전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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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김용택
허전하고 우울할 때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
어딘가 달려가 닿고 싶을 때
파란 하늘을 볼 때
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둥 떠가면 더욱더
저녁노을이 아름다울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둥근 달을 바라볼 때
무심히 앞산을 바라볼 때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빗방울이 떨어질 때
외로울 때
친구가 필요할 때
떠나온 고향이 그리울 때
이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내 그리움의
그 끝에
당신이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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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지요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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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꽃 편지
김용택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지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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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당신이예요
김용택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모습을 통째로 알고 계시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일 터이지요
그분이 당신입니다
나의 아흔아홉 잘못을 전부 알고도 한점 나의 가능성을
그 잘못 위에 놓으시는 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일 테지요
그이가 당신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랑이고 싶어요
당신의 한점 가능성이 모든 걸 능가하리라는 것을
나는 세상 끝까지 믿을래요
나는,
나는 당신의 하늘에 첫눈 같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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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꽃
김용택
내 안에
이렇게 분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 이예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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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말아요
김용택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서리 내린 가을날
물 넘친 징검다리를 건너던
내 빨간 맨발을
잊지 말아요.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달 뜬 밤, 산들바람 부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보던 그 밤을
잊지 말이요.
내 귀를 잡던 따스한 손길,
그대 온기 식지 않았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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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입니다
김용택
언젠가 부터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나는 물로 끌수 있을지 알았습니다
불길이 목울대를 넘나들 땐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길은 갈증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어느덧
물로 끌 수 없는
큰 불길에 싸여 있는 내 가여운 영혼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도 남을
이 영혼을 당신은 아시기나 한지요
아,
그냥 두지요
재가 되도록 타게 그냥 두지요
불은 타올라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에
몇 방울의 물은 물이 아닙니다
그도 따라 뜨거운 불입니다
아,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이 불길로 내가 다 타겠습니다
내가 불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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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날이 저문다
김용택
누이야 날이 저문다
저 물을 따라가며
소리 없이 저물어 가는 강물을 바라보아라
풀꽃 한 송이가 쓸쓸히 웃으며
배고픈 마음을 기대오리라
그러면 다정히 내려다보며, 오 너는 눈이 젖어 있구나
배가 고파
바람 때문이야
바람이 없는데?
아냐, 우린 바람을 생각했어
해는 지는데 건너지 못할 강물은 넓어져
오빠는 또 거기서 머리 흔들며 잦아지는구나
아마 선명한 무명 꽃으로
피를 토하며, 토한 피 물에 어린다
누이야 저 물의 끝은 언제나 물가였다
배고픈 허기로 저문 물을 바라보면 안다
밥으로 배 채워지지 않은 우리들의 멀고 먼 허기를
누이야
가문 가슴 같은 강물에 풀꽃 몇 송이를 띄우고
나는 어둑어둑 돌아간다
밤이 저렇게 넉넉하게 오는데
부릴 수 없는 잠을 지고
누이야, 잠 없는 밤이 그렇게 날마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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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고 싶어요
김용택
오늘
가을 산과 들녘에 물을 보고 왔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 지나고
작은 개울들 건널 때
당신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산의 품에 들고 싶었어요, 깊숙히
물의 끝을 따라 가고 싶었어요
물소리랑 당신이랑 한없이
늘 보고 싶어요
늘 이야기하고 싶어요
당신에겐 모든 것이 말이 되어요
십일월 초하루 단풍 물든 산자락 끝이나
물굽이마다에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이 보고싶어서 가슴이 저렸어요
오늘
가을 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하루 왼종일
당신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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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의 사랑
김용택
이 세상에
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
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차곡차곡 솔잎 쌓인
고요한 그 숲길에서
오래 이룬
단 하나
단 한번의 사랑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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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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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는 하루
김용택
해 뜨니
앞 강물은 저리 흐르요
당신 떠난 이 나라
쳐다볼 곳 없는 내 눈길이
먼 허공을 헤매이고 헛헛한 마음도
이리 기댈 곳 없으니
이 맘이 시방 맘이 아니요
차라리
이 몸 이 맘
이 강물이 다 가져가불고
저 강물에 얼른얼른
오늘 해도 져불면 좋것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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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무슨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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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
김용택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는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내시어요
나는 힘없지만
내 사랑은 힘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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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김용택
양말도 벗었나요.
고운 흙을 양손에 쥐었네요.
등은 따순가요.
햇살 좀 보세요.
거 참, 별일도 다 있죠.
세상에, 산수유 꽃가지가
길에까지 내려왔습니다.
노란 저 꽃 나 줄 건가요.
그래요.
다
줄게요.
다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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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어요
김용택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마음을 돌리려고
아무리 뒤돌아서고 뒤돌아서도
당신은 나보다 빨리 도시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계십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이 마음을
어디에다 다 감추고
보고 싶다는 이 말을
어디다 다 하겠어요
보고 싶어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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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옷 입은 산 그림자
김용택
그저께 엊그저께 걷던 길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었습니다
그저께 엊그저께 그 길에서
어제 듣던 물소리
오늘은 어데로 가고
새로 찾아든 물소리 하나 듣습니다
문득 새로워 걷던 발길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귀기울여봅니다
아, 그 물소리 새 물소리
봄옷 입은 산그늘 강 건너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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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그냥 지나요
김용택
올 봄에도
당신 마음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이렇게 내 다니는 길가에 꽃들 피어나니
내 마음도 지금쯤
당신 발길 닿고 눈길 가는 데 꽃 피어날 거예요
생각해 보면 마음이 서로 곁에 가 있으니
서로 외롭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린 서로
꽃보면 쓸쓸하고
달보면 외롭고
저 산 저 새 울면
밤새워 뒤척여져요
마음이 가게 되면 몸이 가게 되고
마음이 안 가더래도
몸이 가게 되면 마음도 따라가는데
마음만 서로에게 가서
꽃 피어나 그대인 듯 꽃 본다지만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어요
당신도 꽃산 하나 갖고 있고
나도 꽃산 하나 갖고 있지만
그 꽃산 철조망 두른 채
꽃 피었다가
꽃잎만 떨어져 짓밟히며
새 봄이 그냥 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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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김용택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 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 달아도 내달아도
속 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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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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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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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비밀들을 알았어요
김용택
닫힌 내마음의 돌문을열며
꽃바람 해바람으로 오신 당신
당신으로 하여
별이 왜 반짝이는지
꽃이 왜 꽃으로 피어나는지
세상에 가득한 그런 가만가만한
비밀들을 알게 되었어요
아, 내 가는 길목마다
훤하게 깔린 당신
돌부리 끝에 걸려 넘어져도
거기 언뜻 발끝이 아프게 부서지는 당신
이 초겨울 빗줄기 속에서도
들국 같은 당신의 얼굴이
하얗게, 하얗게 줄지어 달려옵니다
이 길에 천둥 번개 칠까 두려워요
☆★☆★☆★☆★☆★☆★☆★☆★☆★☆★☆★☆★
슬픔
김용택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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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없는 병
김용택
그리움이, 사랑이 찬란하다면
나는 지금 그 빛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파서 못 견디는 그 병은
약이 없는 병이어서
병중에 제일 몹쓸 병이더이다
그 병으로 내 길에
해가 떴다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돌아흐르며
내 병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리 그 병이 깊어져도
그대에게 이르지 못할 병이라면
이제 나는 차라리 그 병으로
내가 죽어져서
아,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 곁에 흐르고 싶어요
☆★☆★☆★☆★☆★☆★☆★☆★☆★☆★☆★☆★
집
김용택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며 가는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푸른 나무
김용택
나도 너 같은 봄을 갖고 싶다
어둔 땅으로 뿌리를 뻗어내리며
어둔 하늘로는 하늘 깊이 별을 부른다 너는
나도 너의 새 이파리 같은 시를 쓰고 싶다
큰 몸과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들이
세상의 어느 곳으로도 다 뻗어가
너를 이루며 완성되는 찬란하고 눈부신 봄
나도 너같이 푸르른 시인이 되어
가난한 우리나라 봄길을 나서고 싶다.
푸른 나무 1
김용택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푸른 나무 2
김용택
너를 부르러
캄캄한 저 산들을 넘어
다 버리고 내가 왔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리운 너의 이름을 부르러
어둔 들판 바람을 건너
이렇게 내가 왔다
이제는 목놓아 불러도
없는 사람아
하얀 찔레꽃 꽃잎만
봄바람에 날리며
그리운 네 모습으로 어른거리는
미칠 것같이 푸르러지는
이 푸른 나뭇잎 속에
밤새워 피를 토하며
내가 운다.
푸른 나무 3
김용택
나무야 푸른 나무야
나는 날마다
너의 그늘 아래를 두 번씩 지난다
해가 뜰 때 한 번
그 해가 질 때 한 번
걷다가 더울 때 나는 너의 뿌리에 앉아
너의 서늘한 피로 땀이 식고
눈보라칠 때 네 몸에
내 몸을 다 숨기고
네 더운 피로 내 몸을 덥히며
눈보라를 피했다
나무야
잎 하나 없는 잔가지 그림자만
맨땅에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내겐 푸르른 나무야
내가 서러울 때
나도 너처럼 찬바람 가득한
빈 들판으로 다리를 뻗고
달이 구름 속에 들 때 울었다
목놓아 운 적도 있었단다 나무야
푸른 나무야
우리 마을이 네게서 시작되고
네게서 끝나듯이
내 삶의 기쁨도
네게서 시작되고
네게서 이루어졌다
오늘은 나와 함께 맘껏 푸르른 나무야
푸른 나무 4
김용택
우산 없이 학교 갔다 오다
소낙비 만난 여름날
네 그늘로 뛰어들어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서서
비 피할 때
저 꼭대기 푸른 잎사귀에서
제일 아래 잎까지
후둑후둑 떨어지는 큰 물방울들을 맞으며
나는 왠지 서러웠다
뿌연 빗줄기
적막한 들판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
느닷없는 저 소낙비
나는 혼자
외로움에
나는 혼자 슬픔에
나는 혼자
까닭없는 서러움에 복받쳤다
외로웠다
네 푸른 몸 아래 혼자 서서
그 수많은 가지와
수많은 잎사귀로
나를 달래주어도
나는 달래지지 않는
그 무엇을, 서러움을 그때 얻었다
그랬었다 나무야
오늘은 나도 없이
너 홀로 들판 가득 비 맞는
푸르른 나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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