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밥/박창기

향기로운 재스민 2019. 6. 4. 11:07

 

박창기

 


밥이 되기 싫어
제 밥 찾아
밥 걱정했더니
오히려 밥이 되란다


어무이요
이게 아입니더


우리 엄마 날 배고
꽁당보리밥 잡수시며
제 새끼 잘 먹이려
밥 걱정하던 때가
엊거제 같은데
나는 벌써
이렇게 커서
날이면 날마다
밥 걱정해 가며
제 밥 노릇에
즐거운 비명이다
님은 이미 밥 걱정을 잊은 채
어이어이 꽃상여 타고
저승길로 여행 떠나시고
세상 밥이라곤 모르는
여유를 가지셨다


그런데
어무이요
그게 아입니더


예나 지금이나
그 놈의 밥 때문에
태어나고 죽어가고
힘주고 약해지고
뻐기고 위축되고
훔쳐먹고 뱉어내고
부르고 고프고
풀리고 갇히고
즐겁고 슬프고
기쁘고 안타까웠지
태초에 하늘이 열린 이래
세상에 존재하는 밥치고
어느 것 하나 공평한게 없었다
가끔 현자가 나타나서
태평세월이 엮어질 때면
세상 밥은 그나마 제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무이요
밥 잘 다스리면
내 배, 네 배, 동네 배
고장 배, 사회 배, 나라 배
모두 평안하다 하셧지요


어무이요
그런데
그게 아이라예
내려다 보실 시간 있으시거든
한번쯤 내려다 보이소
마, 우스워요
세세처처 밥 때문에
일 안 벌어지는 곳
어디 있능교


사업주와 노동자의 갈등
국회의원과 선거구민의 갈등
교육관료와 교사의 갈등
정부와 국민의 뿌리깊은 갈등
폭력배들의 이권 다툼의 갈등
버스기사와 승객의 갈등
교통순경과 운전자의 갈등
사는 자와 파는 자의 갈등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갈등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종교단체와 신자의 갈등
의사와 환자의 갈등
교사와 학생의 갈등
집주인과 세든자의 갈등
주인여자와 파출부의 갈등
부부 애정의 갈등
부모 형제 간의 갈등
등등
아이고 어지럽고 번거로워라
이 많은 일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을까
밥이 제 밥이 아니거든
밥이 될 짓이나 말아야지
밥이 되도록 엮지도 말아야지


세월마다
가진 자, 누린 자, 있는 자들은
밥들이 언제나
밥통 속에 있기를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의 속성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세상에서의 안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들에게
밥은 최대의 도구임에 틀림없다


밥 때문에 협잡하고
밥 때문에 작당하고
밥 때문에 비리 만들고
밥 때문에 이중장부 만들고
밥 때문에 비밀수수료 주고받고
밥 때문에 눈알 부라리고
밥 때문에 고성이 오고가고
밥 때문에 만사 주눅 든다


밥아,밥아, 밥 먹어라
그래,그래, 먹을께
주는 밥이나 먹어라
어디 어디 있는고
내 손바닥에 있다
어르고 달래고 주물러
건데기는 빼놓고
남은 찌꺼기 쪼개어
큰소리치며 주는 밥이다
고개 숙여 받아라
황공무지로소이다


어무이요
그래도 우리 밥장사 할 때는
밥다운 밥 만들어 팔았었지요
식사 때면 삼삼오오 몰려와서
맛있다고 게걸스레 먹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밥 앞에 놓고
밥 걱정하던 사람
어디 있덩교
밥다운 밥 만들어 놓으면
그 정성 보고 몰려와서는
맛 한입, 정성 한입, 인심 한입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요새는 안그렇심더
밥 앞에 놓고
밥 투정이 예사라예


흥부는 밥 때문에
자존심 조차 버리고
밥주걱에 뺨 맞아가며
밥풀데기라도 구걸하지만
천심이 발동하여
밥 걱정 없는 부자 되게 했네
그래도 내내 베풀고 살았지
현자다운 면모가 여기 있었군


밥을 떡 주무르듯하던 사람도
밥줄 떨어지더니 풀이 죽어
옴짝달싹 못하고 숨죽여 살던데
밥 죽이길 좋아하던 '네로'도
불 밥이 되던데
힘 밥 좋아하던 혁명가도
결국엔 총알 밥이 되던데
밥 좋아 밥 등쳐먹다
배탈난 자 얼마나 많노
제 밥 찾겠다고 법 좋아하던 자
간교한 술수나 쓰더니
그 덜미에 혼이 나더구나


아서라 말어라
내 밥이고 네 밥이고
먹을 만큼 먹고
가질 만큼 가지고
베풀 만큼 나누어라
더도 멀고 덜도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허세 부리지 말고
빈 손 나그네로 왔다가
빈 손 나그네로 돌아가는
무심(無心)보살이나 되거라


비정한 세월아, 욕말어라
부정한 밥 챙겼거던
부정한 방법으로 건네주고
떳떳한 밥 챙겼거던
터놓고 베풀거라
무리무리 까마귀 무리
시궁창에 머리부터 박고
무리무리 백로무리
명경지수에 목욕한다
뿌린 만큼 거두고
심은 만큼 거두리니
세월아, 무정한 세월아, 걱정말어라


사바세상 사람들아!
밥을 사랑하세
아낌없이 사랑하세
제 밥 구실 제대로 하며
밥 사랑, 생명 사랑
열렬히 구하세
밥이 돠라거든 눈을 밝히고
밥이 되라거든 마음을 열고
밥이 돠라거든 바른 말 토하고
밥이 되라거든 거짓 꼬라지 벗어던지고
밥이 되라거든 분연히 일어나세
밥다운 밥 먹을 시간 꿈꿔 가게요
밥다운 밥 먹을 나날 밝혀가게요
밥다운 밥 먹을 세월 엮어 가게요


어무이요
요새
밥 맛은 어떵교

 

 

 

-시집『또 다른 나를 찾아서』(그루)


 


'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정해정  (0) 2019.08.22
김용택 시 모음  (0) 2019.08.12
시를 읽는다/박완서  (0) 2019.01.25
詩經의 黍離(서리)  (0) 2019.01.07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이기철  (0) 2018.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