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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향기로운 재스민 2012. 1. 4. 07:35

 

 

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 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현대 공론󰡕 195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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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당이 이 시를 발표한 시기는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년 후인 1954년 ‘현대공론’ 지면을 통해서다. ‘현대공론’은 1953년 10월 창간하여 1955년 1월 통권 13호를 끝으로 문을 닫은 종합시사지이다. 문학지가 아니란 점이 고려되어서인지 문학적 취향이 바뀌어서인지 이전의 강렬한 생명의 솟구침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달관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시의 화법 또한 내면의 고백이나 관조가 아닌 생활인을 위한 교훈적 잠언 형식이다. 그래서 문단 일부에서는 ‘미당 문학의 제2기 대표작’이란 평가를 하지만, 그 이후의 작품들(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등)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민족정서와 샤머니즘에 비춰보면 그리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닌 것 같다.

 

 1954년이면 미당이 광주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무렵이다.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아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했겠지만, 미당 역시 당시 교수 봉급이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궁핍으로 삶이 꽤 고달팠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럴 때 광주 어디에서나 쳐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그 크고 의젓하며 언제나 변함없는 자태를 삶의 모형으로 삼아 이 시를 썼던 것이다. 가난이란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일 뿐 그 속에 있는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순수성까지를 덮어 가리지 못한다는 극단적 정신주의가 작품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이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해 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는 의연한 다짐을 한다. 또한 참으로 인간을 찌들게 하는 것은 물질적인 궁핍이 아니라 정신적인 빈곤이라는 생각으로 갸륵한 부부애를 권고한다.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권순진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다시 보고 싶은 글이라... 미당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