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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행숙] 포옹

향기로운 재스민 2012. 1. 23. 17:43

 

그저 덮을 수밖에 없는 타자 / 강신주

 

김행숙과 바흐친

 

 

 

 

포옹 / 김행숙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 -

 

 

 

 

- 1 -

내가 당신을 안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나를 안은 건가요?

 

 

  2008년 민음사에서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라는 제목을 가진 두 권짜리 시선집을 출간했습니다. 한국의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시선집이지요. 추천 결과 우리 시인들이 가장 많이 추천한 시인은 서정주徐廷柱, 1915~2000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었습니다. 수많은 시인들 중 서정주 시인이 62회 추천을 받았고, 김수영 시인은 58회 추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시인들은 서정주처럼 자신의 삶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외적인 저항을 우회하면서 세계에 파스텔 톤을 부여하는 서정적인 길을 가거나, 아니면 김수영처럼 외적인 저항에 맞서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상처에 신음하는 자유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정주의 길과 김수영의 길! 그런데 1999년에 한 시인이 우리에게 조용히 찾아와 두 가지 길만이 아닌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게 됩니다. 그녀가 바로 김행숙金幸淑, 1970~ 시인입니다.

 

  김행숙 시인이 걸으려고 했던 길을 우리는 '세속적 타자로의 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김행숙의 길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사랑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할 겁니다. 모든 사랑은 첫눈에 빠진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도 있고, 오랫동안 다른 인간관계에 연루되었던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놀라운 사실과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치명적 고독fatal solitude'에 빠집니다. 사랑에 빠진 자의 고독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성질의 고독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을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 그 사람만이 그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음악도, 카페도, 커피도, 심지어 영화도 치명적 고독을 완화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느낌만을 부각시켜 주니까요.

 

  사랑에 빠지자마자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 그리고 이어지는 치명적인 고독의 상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필사적으로 그 사람을 알려고 합니다. 당연히 이 순간 우리의 오감은 극단적으로 활성화될 겁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모든 신호, 즉 그 사람의 속내를 해석하려면 그가 내뿜는 모든 기호들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든지 우리의 후각이 모든 감각을 압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과거에 맡지 못했던 향수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요. 바로 후각적 자아가 출현하는 순간입니다. 반면, 어떤 때는 우리의 촉감이 그 사람의 기호에 열릴 수도 있습니다. 길을 함께 걸을 때 간질이듯이 내 팔을 스치며 나를 전율시키는 그 사람의 손은 무슨 의미를 띠는 것일까요? 바로 촉각적 자아가 탄생하는 순간이지요.

 

  이제 김행숙 시인의 길이 조금 눈에 보이나요? 서정주의 길이나 김수영의 길은 분명 다르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자아는 하나의 통일된 자아였습니다. 그렇지만 김행숙의 길을 걷는 자아는 통일된 자아가 아니라 미세하게 분열되고 복수화될 수밖에 없는 자아, 즉 '자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은 자신이 던지는 기호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을 선택하도록 강제합니다. 상대방이 콧노래를 부를 때, 시각적 자아가 출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청각적 자아가 출현하여 콧노래에 담긴 그의 속내를 감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인과 포옹했을 때 모든 자아 형식을 누르고 촉각적 자아가 탄생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2010년 11월에 출간된 《타인의 의미》라는 시집에 등장하는 <포옹>이란 시만큼 촉각적 자아로부터 부각되는 사랑하는 자아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각적 자아가 자신을 고집한다면 포옹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포옹했을 때에만 우리에게 촉각적 자아가 조용히 찾아올 겁니다. 시인에게 포옹은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그 무엇입니다. 파도가 파도를 덮듯이 이루어지는 포옹에서, 즉 촉각적 자아와 촉각적 자아가 만나서 만드는 공간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가 되는 것일까요? <포옹>이란 시에서 김행숙 시인이 묻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시인은 포옹이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과도 같고,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와도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김행숙 시인은 포옹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철학자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속내를 헤아려보도록 하지요.

 

 

 

 

- 2 -

나의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가르쳐주는 타자

 

 

  바흐친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그가 라블레Francois Rabelais, 1494?~1553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의 애독자였다는 사실일 겁니다. 바흐친은 르네상스 시절을 풍미했던 라블레의 소설들, 특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La Vie Inestimable du Grand Gargantua, Pere de Pantagruel》를 통해서 '카니발carnival'이란 개념의 중요성을 확인합니다. 이어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특히 《지하생활자의 수기Zapiski iz podpolya》를 통해 대화dialoue와 다성성polyphony의 논리를 정교화합니다. 카니발, 대화 혹은 다성성의 논리 이면에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포착하려는 그의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바흐친이 카니발을 중시하는 이유는 카니발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행위자인 동시에 관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카니발에는 외부가 없는 셈입니다. 카니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체인 동시에 동시에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인 관객, 즉 객체로만 머물면서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는 우리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지요.

 

  주체이면서 객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타자에게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경우 우리는 주체가 되고, 반대로 타자가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우리는 객체가 됩니다. 카니발의 춤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춤을 리드하는 순간이 있고, 타자가 나를 리드하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나와 타자는 역동적으로 어느 순간 주체였다가 다른 순간 객체가 되는 카멜레온과 같습니다. 바흐친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두 사람dia의 이야기logos가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바로 대화니까 말입니다. 타자와 춤을 추고 나면,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춤에도 나와 타자의 흔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모든 이야기의 이면에는 다양한poly 목소리들phone의 역동적인 작용이 전제되어 있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이지요.

 

  타자가 없다면 카니발을 달뜨게 만드는 춤도, 그리고 대화로 엮어지는 이야기도 불가능한 법입니다. 어쩌면 바흐친이 타자의 문제에 골몰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자를 해명하지 않는다면 카니발, 대화, 다성성의 논리도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바흐친이 어떤 방식으로 타자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지 직접 엿보도록 하지요.

 

  내가 나의 밖에 그리고 맞은편에 마주 서 있는 총체적 인간을 관찰할 때, 우리는 실제로 체험하는 구체적인 시야들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각각의 계기에서, 내가 관찰하고 있는 타자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나와 얼마나 가까이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나는 나의 밖에 그리고 맞은편에 마주 서 있는 그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항상 보고 알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신체의 일부분(머리, 얼굴, 표정), 그의 등 뒤의 세계, 여느 상호 관계 속에서 나는 접근할 수 있지만 그는 접근할 수 없는 일련의 대상과 관계.

 

-《말의 미학Estetika slovesnogo tvorchestva》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직접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눈과 얼굴, 그리고 자신의 뒷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거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이나 뒷모습은 항상 좌우가 바뀐 모습, 그러니까 불완전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이 평생 보지 못하는 것이 이런 몇몇 모습뿐일까요?

 

  친구와 함께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는 친구와 친구의 등 뒤에 풍경들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내 뒤에 펼쳐지는 풍경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다 보면, 여기서 타자의 위대함을 직감하게 됩니다. 타자는 나의 눈, 나의 얼굴, 나의 뒷모습, 심지어는 내 뒤에 펼쳐지는 풍경마저도 가볍게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우리에게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겁니다. 서른 문제 중 하나만 틀렸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다른 문제는 다 틀리고 자신이 틀린 문제만은 정확히 맞힌 친구를 보았을 때, 그가 친구에게 말하기 미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대화의 관계에서 타자의 타자는 바로 나일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바흐친은 나도 타자만큼 비범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도 타자 자신이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아주 가볍게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바흐친의 말대로 "나는 나의 밖에 그리고 맞은편에 마주 서 있는 그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형상을 항상 보고 아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카페에 앉아 있는 이 순간, 친구가 나를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바라볼 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우리 눈에 들어온다. 물론 적당한 위치를 잡음으로써 각기 다른 시야들에서 빚어진 차이점을 최소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 차이를 완전히 없애려면 하나로 합쳐져서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존재하는 나의 바라보기, 앎, 소유의 잉여는 세계 속에서 나의 위치가 갖는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말의 미학》 

 

  현대 프랑스 철학의 대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와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도 타자를 숙고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차이를 숙고하는 프랑스 철학의 전통을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차이란 타자와 나와 다르다는 감각으로부터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아쉽게도 그들은 나 자신이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주체를 압도해 들어오는 신적인 것으로 타자를 사유했던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타자를 이해하게 되면 주체, 즉 나는 너무나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상태에 떨어지게 됩니다. 타자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레비나스가 타인의 얼굴을 윤리적 실천을 강제하는 신적인 명령처럼 이해했던 사실이 이 점을 매우 잘 보여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바흐친의 탁월함이 빛을 발하지 않나요? 사실 그의 탁월함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통찰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즉 주체는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타자는 또 다른 타자인 내게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내 자신이 타자의 타자라는 사실, 이로부터 바흐친은 우리 자신이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모든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존재하는 나의 바라보기, 앎, 소유의 잉여는 세계 속에서 나의 위치가 갖는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타자가 내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숙고하다, 마침내 내가 타자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존재인지를 추론하는 바흐친의 생각에는 절묘한 반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3 - 

너무도 심오한 포옹의 의미

 

 

  나나 타자는 모두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내개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래서 바흐친은 말했습니다. "적당한 위치를 잡음으로써 각기 다른 시야들에서 빚어진 차이점을 최소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 차이를 완전히 없애려면 하나로 합쳐져서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붙어 있으려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한 일은 아닙니다. 비록 타자가 서 있는 자리로 육박해 그와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가급적 그와 나 사이의 차이점을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물론 타자가 떠나서 비어 있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타자가 한때 머물던 자리에 들어간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 순간 타자는 다른 자리에 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타자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항상 사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불행한 숙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타자와 직대면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는 절대로 타자를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이 순간이 과거가 되어버렸을 때에만 뒤늦게 그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타자에 대한 접촉의 욕망은 불가피한 겁니다. 그를 그 자신이 아는 것만큼 알고 싶으니까요. 타자를 알아야 그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고 내 곁에 머물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타자를 알려는 욕망은 바로 그와 하나가 되겠다는 불가능한 욕망이고, 이것이 포옹을 포함한 육체적 접촉의 무의식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자를 알려는 우리의 욕망은 포옹이나 육체적 접촉을 통해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상대의 표면에만 닿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흐친도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타자만을 껴안을 수 있고, 사방에서 부여잡을 수 있고, 오직 그의 경계만을 사랑스럽게 매만질 수 있다. 타자의 연약한 유한성, 완결성, 그의 이곳-현재의 존재-등 모든 것은 나에 의해서 내적으로 이해되며, 말하자면 나의 포옹으로 형성된다. 이런 행위 속에서 타자의 외적 존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기 시작하며, 어떤 새로운 종류의 의미를 획득하고, 새로운 존재의 차원으로 태어난다. (......) (그래서 나는) 타자의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며, 그의 존재의 모든 구성적 특징 속에 있는 그를 덮어줄 수 있으며,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다.

 

-《말의 미학》 

 

  분명 타자는 만질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바흐친의 말대로 우리는 "오직 그의 경계만을 사랑스럽게 매만질 수 있을"뿐입니다. 그렇지만 포옹을 통해 나와 타자는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게 됩니다. 나의 포옹을 받아주고, 심지어는 나를 적극적으로 퐁옹하려는 타자를 경험함으로써 나도 그도 얼마나 절망적으로 나와의 불가능한 일치를 꿈꾸는지 드디어 알게 되니까요. 바흐친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타자의 연약한 유한성, 완결성, 그의 이곳-현재의 존재-등 모든 것은 나에 의해서 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포옹을 통해 타자는 나를 압박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일치하려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고, 이제 사랑이란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겁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끝내 사랑하는 타자의 속내를 이해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아니, 우리는 끝내 사랑하는 타자의 속내에 이를 수 없을 겁니다. 그건 타자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바흐친의 표현, 즉 "타자의 모든 것을 덮어준다"라는 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니 결코 알 수는 없을 테지만, 그와 같이 있고 싶다는 사랑의 아련한 속내를 긍정해버리는 겁니다.

 

  러시아어 '덮어주기OCEHEHИE'는 보호하고, 피신시켜주고, 은혜를 베푸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흐친에게서 이 표현은 이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포옹이란 육체적 덮어줌을 의미하는 동시에 타자의 타자성을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정신적 품어줌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김행숙 시인이 "파도를 덮는 파도"라고 노래할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바흐친적인 통찰에 공감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떠십니까? 이제 포옹을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과도 같고,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와도 같다고 이야기한 시인의 속내에 공감할 수 있으신가요? 서로를 덮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가 되려는 희망을 버릴 수 없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애절한 두 사람의 마음이 바로 포옹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얼마 뒤에 두 사람은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떨어져야만 합니다. 포옹으로 타자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으니까, 그것은 단지 나와 타자의 표면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포옹은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를 함축하고 있는 겁니다. '벌어질 시간'과 '벌어질 아가리'의 이미지를 통합한 시인의 표현이 절묘하기까지 합니다. 너무나 짧기만 한 포옹을 안타깝게 마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연합니다.

 

  그래서 김행숙 시인은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말했던 겁니다. 자신은 "남을 속속들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관계의 방식이자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이지요. 타자에 대한 이런 감수성이 시인으로 하여금 서정주나 김수영과는 다른 길을 가도록 한 원동력이었던 셈입니다.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 2011)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푸른하늘저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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