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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향기로운 재스민 2012. 6. 1. 07:36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안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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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 결혼을 준비하고 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도 나는 이 시가 발표되기 거의 20년 전, 당시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는 걸 보고 에라 모르겠다며 아무런 개념도 대책도 없이 결혼이란 걸 해버렸다. 그렇게 한 결혼이 요행히 탱자탱자 랄랄라 잘 살면 다행이겠는데 전혀 그러질 못했다.

 

 그런 나에게 두 달여 전 가까운 친구끼리 밥 먹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대뜸 제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서달라는 것이다. 그 친구 말인즉슨 여태껏 자기가 참석해 본 결혼식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주례사를 한 분이 작가 김홍신이었다면서 나도 명색이 작가이니 못할 것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에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극구 사양했건만, 옆에서 다른 친구가 부추기는 통에 ‘까짓 거 해보지 뭐’라며 농담처럼 승낙을 했다.

 

 그랬지만 정말 내가 주례를 서게 될 줄은 몰랐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도 아니고 찾으려면 얼마든지 가까이에서도 명망높고 경험 많은 분을 모실 수 있겠는데, 그는 그때 주고받은 말을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주례만 봐도 신랑 측의 집안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니다. 요즘 주례사는 5분 정도만 하면 족하다고는 하지만 면허증도 없는 무면허 주례인지라 실수는 하지 않을까 부담이 크다.  

 

 그 태산 같은 걱정을 부려놓을 날이 바로 내일(6월2일)이다. 친구 여자동의 큰아들 환원군과 그의 배필이 될 배윤경양은 이 시에서처럼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기에 그럴 때를 대비해 반면교사의 경험으로 뭔가 해줄 말이 있을 것도 같은데 오늘 하루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아무쪼록 그들의 결혼도 내 주례사도 모두 자~알 돼야 할 텐데...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처음으로 하는 주례사를 축하, 격려하기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