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이명순
하안거에 들어간 스님은
묵언수행중이시다
한번 단 한 번도 일탈을 꿈꾸진 않았다
차박 차박 쌓여진 경전을 읽고
결제에 들어선 화두에 빠져
사그락 사그락
좌선으로 쪼그라든 형액을 풀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참선을 한다
감은 두 눈 뜨이는
시간의 간격 사이로 새하얀 말이 되어
한 켜 한 켜 집을 짓는 것이다
제 입에서 토해낸 한 가닥의 희망들이
씨실과 날실로 짜여져
넓게 펼친 영혼의 일광욕을 시키는 오후
훌 훌
만행 길 떠나시는 스님의
뒷모습이 초연하다
- 대구MBC문화센타 시 창작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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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를 쓰기에 앞서 무엇을 쓰지, 글감을 어디서 구할까, 어떻게 써야 잘 썼다는 소리를 듣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시는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쓰기도 하고 느끼거나 생각한 것을 쓸 수도 있다. 보는 것도 그저 목격에 그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관찰한 연후라야 겨우 시의 실마리 하나가 잡힌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감수성이다. 감수성은 사물을 대할 때 이미 알고 있는 고정관념의 잣대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난생 처음 보듯 낯설고 생뚱맞게 보는 시선도 가당하다. 그래야 신선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데 시의 종자, 즉 사물의 이미지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관찰에 있어서도 덮어놓고 눈알을 굴리고 들이댈 게 아니라 몇 가지 관점은 있다. 예를 들면 ‘누에’를 봤을 때 처음엔 누에를 있는 그대로 본다. 무심히 보는 가운데도 느낌이 올 수 있다. 다음엔 그 모양과 움직임을 개별적인 것과 집단을 구분해 관찰한다. 그리고 누에의 왕성한 식욕을 보고 뽕잎을 먹으면서 내는 소리를 듣는다. 뽕잎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런 다음 누에 속에 내재된 생명력을 본다. 한 생명체에 대한 지긋한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 고치에서 나비까지 누에의 전후 변천과정을 살핀다. 누에의 효능이라든가 누에가 뽑아내는 명주실과 실을 짜는 물레를 생각한다. 누에나 비단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들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서는 개성 있는 좋은 시를 얻긴 어렵다. 깊은 사유에 의해 관찰이 심화되고 언어의 변별력을 높여가는 노력이 따를 때만이 가능하다. 여기서 시적 성공 여부가 갈리고 시인이 나눠진다. 이를테면 누에의 뽕잎 갉는 소리가 지루한 빗소리 같다는 느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뽕잎 먹는 모습에서 사각사각 시간을 갉아먹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용이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누에의 잠’ ‘ 누에의 집’ ‘누에의 꿈’ 등도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주제여서 어쩌면 이미 출시된 품목일 것이다.
이명순 시인의 ‘누에’는 그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가 하안거에 든 ‘묵언수행’중인 스님의 이미지로 구체화된 비교적 참신하면서도 단정하고 모범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일탈 없이’ 일념으로 사각대는 아득한 적막의 그 모습을 스님의 참선에 대비시켜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시인의 내면까지 엿보게 한다. 사물이 가진 이미지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이 곧 시인의 개성이 된다. 또한 그것은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정보여야 하고, 이미지의 흐름에 대한 견고함이 유지되어야 한다. 다만 이 시에서는 모범적인 반전에 대한 배려라든가 파격이 하나 쯤 눈에 띈다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은 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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