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출 <천칭>
깔깔 웃는 아이와 그 웃음소리가 시끄러워 창문을 닫는 어른의 대비가 흥미롭다. 문득 위 인용시의 시적 화자에게 묻고 싶은 충동이 인다. “무언가에 쫓겨본 적 있나?” 시적 화자는 내 질문에 다음처럼 즉각 답한다. “사실 나는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그냥 편하게 시소를 타고 싶은 애인데, 실제로는 현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고 있다네. 위 작품 「천칭」이 그런 상황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멜로드라마인 셈이지. 남자는 ‘나’이고 여자는 ‘아이’인데 서로 어떻게 지내는 게 맞는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런 것들을 멜로와 액션을 통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지금 내가 처절하게 하고 있는 고민이지.”
그렇다면 굳이 창문까지 닫을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다시 묻고 싶지만, 그가 “한쪽에다 젊음을 얹어 놓고/ 다른 한쪽에다 월급봉투를 얹어/ 수십 년을 저울질하며 살아”온 것을 알기에, “한 그릇의 따끈한 밥과/ 정이 담긴 한 통의 전화까지/ 수평을 맞추려 하”는 것을 알기에, “치우침은 모욕 같아/ 저울이 수평을 이룰 때까지/ 치솟은 그쪽에다/ 화를 꾹꾹 눌러 담곤 하”는 그의 마음자리를 알기에, 그리하여 결국 그가 닫은 창문이 그의 마음임을 알기에 깊은 시선을 그에게 주는 것으로 내 질문을 대신하기로 한다.
다그치듯 그에게 질문 안 하기를 잘 했다. 그의 다른 작품 「해남에서」를 곧 접했기 때문이다.
땅끝 모래밭에 무거운 발을 들여놓자/ 바다의 혀가 가볍게 내 발을 핥는다// 비록 아귀다툼에 절어 여기까지 왔다마는/ 바다의 입맞춤은 멈춤이나 차별이 없어/ 이내 내 마음까지 다 젖는다// 바다 한가운데가 저만큼 무겁기에/ 파도가 이만큼 가벼울 수 있다면/ 내 마음 얼마나 더 무거워야 / 내 발걸음도 저리 가벼울 수 있을까// 물음을 안고 돌아서자/ 나는 땅의 맨 처음에 서 있고/ 바다의 끝은 내 등 뒤에 있어// 시종始終과 경중輕重의 경계를 몰라/ 들이쉰 것 금세 내뱉는/ 파도의 날숨소리를 오래오래 들어라
- 강문출, 「해남에서」
해남에서 시적 화자가 들은 “파도의 날숨소리”는 그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위안은 “땅끝 모래밭에 무거운 발을 들여놓자/ 바다의 혀가 가볍게” 시적 화자의 “발을 핥는” 풍경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비록 아귀다툼에 절어 여기까지 왔다마는/ 바다의 입맞춤은 멈춤이나 차별이 없어/ 이내 내 마음까지 다 젖는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자리가 그래서 한결 가벼워 보인다. 이내 곧 “바다 한가운데가 저만큼 무겁기에/ 파도가 이만큼 가벼울 수 있다면/ 내 마음 얼마나 더 무거워야/ 내 발걸음도 저리 가벼울 수 있을까”라는 성찰의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 성찰의 순간은 “나는 땅의 맨 처음에 서 있고/ 바다의 끝은 내 등 뒤에 있”는 경지를 체감하는 순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시종始終과 경중輕重의 경계를 몰라/ 들이쉰 것 금세 내뱉는/ 파도의 날숨소리를 오래오래” 들으며 이저런 삶의 응어리들을 풀어 내리고 있는 것이다.
외로운 귀들이/ 촌집을 걸어 나와 고샅에 자박자박하자/ 먼 곳까지 비가 내리네// 젖은 길의 발자국이/ 자국을 밟아/ 귀들이 점점 커지고 있네// 큰 귀에 빗물이 흥건하자/ 나는 윙윙거리는 귀울음 소리를 듣네// 쫑긋한 귀들에 갇힌/ 옛 뒤뜰의 댓잎 소리까지 다 듣네// 생각이라는/ 긴 - 끈이/ 내 귓속으로 자꾸자꾸 곤두박질하여 오자// 비로소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네/ 일없다는 말씀 너머로/ 당신의 큰 귀를 훤히 보면서 듣네
― 강문출, 「외로운 귀」
제목인 ‘외로운 귀’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외롭지 않아 보인다. 현실의 논리를 유유히 뛰어넘는 의연함마저 서려 있다. 외로운 귀는 비를 불러들이고, “젖은 길의 발자국이/ 자국을 밟아/ 귀들이 점점 커”진다. “큰 귀에 빗물이 흥건하자” 시적 화자의 귀에는 “귀울음 소리”가 윙윙거린다. 여기서 귀울음 소리는 자연 본성을 억압하며 벌어진 수많은 희생에 대한 은유이다. 시적 화자는 문명의 억압논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한편, 현실이 억압과 희생에 근거해 유지된다는 어두운 진실 역시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는 행위가 절실한 것이다. “쫑긋한 귀들에 갇힌/ 옛 뒤뜰의 댓잎 소리까지 다 듣”는 상황이 그것이고 “생각이라는/ 긴 - 끈이” 화자의 “귓속으로 자꾸자꾸 곤두박질하여 오자// 비로소” 그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것이다. 나아가 “일없다는 말씀 너머로/ 당신의 큰 귀를 훤히 보면서 듣”는 것이 그것이다. 이 지점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이 떠올랐다. ‘생명의 나무’에서 죽음을 읽어낸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의식적인 용기의 소산이었다. 다빈치가 그린 종려나무를 앙상한 죽음의 나무로 바꾸어버린 타르코프스키였지만 그는 묵묵히 물을 주는 인간의 행위가 언젠가는 죽은 나뭇가지들을 푸른 잎사귀로 뒤덮게 할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귀」에서 시적 화자에게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다소 요원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희망을 긍정하는 쪽이든 그것을 비관하는 쪽이든 간에 그것이 자발적인 용기이든 비의지적인 희생이든지 간에 삶의 가혹한 조건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경이롭다.
-중략-
3.
이번에 상재된 시집들을 읽으면서 전경이 되기도 하고 배경이 되기도 하는 갖가지 ‘소리들’로 더러 마음 뜨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어떤 이야기는 회고조로만 말해질 수 있고, 또 어떤 이야기는 1인칭으로만 진술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즈음, 함께 어우러지는 ‘소리들’로 현재진행형을 체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러 층위에서 시적 정황과 연계된 ‘듣는 것’을 통해서 삶의 의미망과 정체성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서 의미 있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들’로 시간과 공간이 한데 어우러지는 미적 거리도 경험했다.
철학자 비엔느는 “나는 두려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대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대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시집을 상재한 시인들 역시 그렇게 존재하는 시인들이다. 추상적인 낭만성이 결코 위기 가득한, 불안한 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이번 시집을 상재한 시인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정직하고도 육중한 인식과 대상에 대한 신실한 태도. 주제의 너비와 깊이 면에서 돋보이는 작품들. 꽤 의미심장하였다. 문제는 감상적이고 과장된 어조를 삭제하고서, ‘소리’가 고양한 흥분에 작품들이 계속 불을 붙여갈 수 있느냐이다. 앞으로 그들의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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