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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향기로운 재스민 2013. 11. 4. 06:50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시집『옛 애인의 집』(솔,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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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 순교를 각오하고 썼다는 이병주의 장편소설「지리산」1권을 펼쳐들었다. 여기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지리(智異)’는 ‘사람의 지혜가 각기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불교적 뜻이 내포돼 있기도 하다. 이병주 작가 자신이 모델인 소설의 전반부 주인공 ‘이규’란 이름을 통해 시인 ‘이원규’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이라 할 이 시가 생각났다.

 

 1967년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그냥 산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등뼈를 세워 쭉 뻗어내려 오다가 한반도 아래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평을 거머쥐고 우뚝 일어서 높고 험준한 봉우리들과 산마루를 펼쳐놓은 산이 지리산이다. 그러나 경관의 수려함만으로 특별한 산이라 하진 않는다. 동족상쟁을 겪으면서 ‘빨치산’이 이곳으로 들어가 전선을 펴고 저항을 한 민족사에 또 다른 이름을 낳게 한 산이기 때문이다.

 

 단풍기세가 남하하면서 피아골도 막 붉게 물들겠다. 16년째 지리산을 지키며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에서 ‘낙장불입’이란 별호를 얻은 바 있는 이원규 시인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등산(登山)이 아닌 입산(入山)하는 마음으로 오라고 한다. 등산은 인간의 정복욕과 교만의 길이지만 입산은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상생의 길이기에 그렇단다. 색안경 쓰고 껌을 쫙쫙 씹어가며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빡빡 산에 오를 거면 아예 오지 말란다.

 

 기어이 오려거든 모든 걸 내려두고 출가자의 마음으로 오란다. 그때 지리산은 어머니처럼 부처님처럼 품으리라. 정복할 것은 마음 속 욕망의 화산이지 몸 밖의 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리산의 골과 물과 바위들의 만유합일을, 그 한결같은 겸손과 첫 마음을 진작 알아차린 시인이 넌지시 건네는 말이다. 그래서 변덕 심한 인간들에게 사는 일이 ‘행여 견딜 만하면 제발 오지 마시라’고 한다. 마치 전향하여 출가한 마지막 빨치산의 아름다운 순교적 목청처럼 들리는 까닭은 왜일까.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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