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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老생물학자의 주례사/이가림

향기로운 재스민 2014. 5. 12. 13:42

어느 老생물학자의 주례사/ 이가림

 

 

오늘 새로이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신랑과 신부에게

내가 평생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기생충을 들여다본 학자로서

짧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미잘이 소라게에게 기생하듯이

그렇게 상리공생(相利共生) 할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개미와 진딧물, 콩과 뿌리혹박테리아

그런 사이만큼만 사랑을 해도

아주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해삼과 숨이고기처럼

한쪽만 도움받고 이익을 보는

편리공생(片利共生) 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는

아름다운 기생충이 되세요.

이상

 

 

- 시집 『바람개비별』(시학, 2011)

 

 테니스(Tennis)라는 우아하고 멋진 경기에서는 0점을 제로(zero)라고 부르지 않고, 러브(love)라고 하더군요. 상대방이 영점을 맞으면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는 걸까요? 아니면 진정한 사랑은 점수로 환산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요?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저서에서 사랑도 하나의 ”기술“로 전제하고, 마치 의학이나 공학처럼 이론과 실제를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의 최고의 수준에 이를 때까지 집중하며 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하였어요. 왜냐하면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을 찿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사람들이 “창조적 기술인 사랑”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첫째는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그 “대상”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과 머므르는 순간을 혼돈 한다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만약 어떤 연인들이 “열정적으로 미친듯이” 사랑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로 만나기전에 얼마나 외로웠던가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으로 보았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격렬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은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어야 한다”고 하였어요. 그러므로 사랑이란 “삶의 한 부분”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삶의 과정”인 것이지요. 그러니 “해삼과 숨이고기처럼/한쪽만 도움받고 이익을 보는/편리공생片利共生 하지 말고”,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처럼 “서로가 서로의 밥이 되는” 배우자가 되어, 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사랑을 위해 언제나 정미소에서 막 도정한 “햅쌀”로 지은 밥처럼 고슬고슬하고 맛있는 사랑을 살아주세요. (서대선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신구대학교수)

 

* 시와시와  에서....

 

2014. 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