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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1월 / 나희덕

향기로운 재스민 2014. 11. 10. 08:15

 

 

11월 /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시집『뿌리에게』(창비,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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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할 게 별로 없고 내세울 게 변변찮던 시절에 이 땅의 확실한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가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기후조건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변동이 없으나 각 계절이 공평하게 석 달씩 나눠 갖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봄과 가을은 여름과 겨울보다 짧아서 더위와 추위를 더 오랫동안 견뎌야 했다. 11월은 우리의 관념 속에서 아직 가을이 분명한데, 세찬 공기가 몸을 파고들 때는 도리 없이 두꺼운 겨울옷으로 몸을 감싸게 된다. 더구나 7일이 입동이고 22일은 소설인지라 절기상으론 이미 겨울로 들어선 셈인데, 그렇다고 냉큼 겨울이라 규정하여 부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어쩌면 시에서처럼 11월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이라 하는 편이 적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환절기’가 아니라, 가을과 겨울 사이의 ‘간절기’로 말이다.

 

 황지우 시인은 ‘11월엔 생이 마구 가렵다’고 했다. 11월의 나무 역시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나는 마당에 우리의 생도 가렵지 않을 리가 없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아이의 손처럼, 이별을 앞두고 맞잡은 연인의 손처럼 그렇게 가을은 깊고 짙어지다가 어느 순간 손을 탁 놓아버릴 것 같은 불안 때문은 아닐까.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임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문득 생각난다.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만으로 건너야할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이다. 11월엔 상여금을 챙겨주는 회사도 없고 나무는 실과의 단맛을 덤으로 주지도 않는다. 내가 무엇을 꿈꾸고 무얼 위해 살았는지, 그래서 얻은 건 무엇이고 또 잃은 건 무엇이었는지, 추정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는 난색이다.

 

 수학능력시험으로 삶의 한파를 예비하는 시련을 안겨주고, 우리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김장을 서두른다. 그리고 견뎌야할 게 계절만은 아니다. 불황이다, 불경기다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가 길게 지속되는 가운데 탐욕으로 한몫씩 단단히 챙긴 이들 말고는 모두 모가지가 바로 펴지질 않는다. 인디언 모호크 족은 11월을 ‘많이 가난해지는 달’이라고 했고, 아라파호족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다. 새벽과 봄날은 꼭 와야 하고, 또 올 테지만 ‘겨울을 이길만한 눈동자’의 수정체가 가장 빛나야할 시기에 그 빛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세상을 바꾸지 않고도 우리에게 희망이란 푸른 빛이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저 나무들처럼 우리 모두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눈물 흘리며 감사’하면서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로 초롱초롱해지기를.

 

 

권순진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 - Bryan Adam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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