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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경주 시 모음 2.

향기로운 재스민 2014. 11. 17. 06:53

 

 

 

김경주 시 모음 2.

 

 

외계 (外界) / 김경주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집<나는 이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주저흔 躊躇痕 /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 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계간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 발표

<2007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봉인된 선험 / 김경주

 

 

하나의 돌
물속에서 건져올린 하나의 돌
돌 하나에 입혀진 무늬는
물의 환상이 다녀간 시간이다
하나의 돌이 물속에서 건져올려지기 위해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꽃
꽃은 나무의 환영이다
나무가 그 환영을 보기 위해선
꽃이 자신의 환영인 나무를 문득 알아볼 때까지이다
서로의 환영을 바라보며 둘은 예감으로 말라간다

 

하나의 무늬
하나의 무늬가 물속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바람의 수런이 필요한가
바람 하나에 입혀진 무늬가
사람의 눈을 들어올리고
바람이 들여다보고 간 시간이 물속에선
누런 그늘이 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에선
잘린 손가락들이 하얗게 잘려가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시간
만삭의 물고기들은 물 속에서 어른거리는
환영을 따라 날고 물이 져 나르는 
그늘의 부력 안에서
배는 물의 무늬를 받는다
배의 환영을 알아보고 등대는 문득 입김을 불고
바람의 장례를 치르는 관습은 음악이 되었다
행주가 상을 문지르듯 배가 쓰윽
들어오고 있다
하나의 개념이 최초의 시간에 정박한다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 -랜덤하우스중앙

 

木蓮 / 김경주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십 이년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戀人)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웹진 <문장>2006년 5월호

 


내 워크맨 속 갠지스 / 김경주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 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날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 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 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붓다의
 사랑은 가슴에 띄우는 열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 김경주 


                                                
 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산동네 지하 방들은 하나 둘 풍선처럼 떠오르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방을 싣고 지구는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음악 같은 일이다 불씨처럼 제 정신을 떠도는 일이지만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내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 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 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지구에서 떠올라온 그네하나가 흘러 다닌다 인간의 잠들이 우주를 떠다니는 동안 방에서 날아와 나는 그네를 탄다 내 눈 속의 아리아가 G선상을 떠다닐 때까지, 열을 가진 자만이 떠오를 수 있는 법 한 방울 한 방울 잠을 털며 

밤이면 방을 밀고 나는 우주로 간다

 

시와 반시 2004년 여름호

 

 

나무에게 / 김경주


 

매미는 우표였다
번지 없는 굴참나무나 은사시나무의 귀퉁이에
붙어살던 한 장 한 장의 우표였다 그가
여름 내내 보내던 울음의 소인을
저 나무들은 다 받아 보았을까
네가 그늘로 한 시절을 섬기는 동안
여름은 가고 뚝뚝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매미는 곁에 잠시 살다간 더운
바람쯤으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가 울고 간 세월이 알알이
숲 속에 적혀 있는 한 우리는 또
무엇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모든 우표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연이다

 

허나 나무여 여름을 다 발송해 버린
그 숲에서 너는 구겨진 한 통의 편지로
얼마나 오래 땅 속에 잠겨 있어 보았느냐
개미떼 올라오는 사연들만 돌보지 말고
그토록 너를 뜨겁게 흔들리게 했던 자리를
한번 돌아보아라 콸콸콸 지금쯤 네 몸에서
강이 되어 풀리고 있을
저 울음의 마디들을 너도 한번
뿌리까지 잡아 당겨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굳어지기 전까지 울음은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당선작>

 

 

 폭설, 민박, 편지 1 / 김경주

 

 

주전자 속엔 파도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인편이 잘린 외딴 바닷가 민박집,
목단이불을 다리에 둘둘 말고 편지를 썼다
들창사이로 폭설은 내리고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들을 만지고 있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처럼 쌓여갔다 심해 속을 건너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쓰다만 편지지로 소금바람이 하얗게 쌓여 가는 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움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쓸쓸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푹푹 끓기 시작하고
방안에 앉아 더운 수돗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몸은 피 속에서 눈물을 조용히 번식시켰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떼죽음 당하는 내면들, 불면은
나 아닌 곳에 가서 쌓이는 가혹한 삶의 은유인가
눈발은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씩 덮어 가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혹성같은 낱말들을
편지지에 별처럼 새겨 넣곤 하였다

 


 

폭설, 민박, 편지 2 / 김경주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 만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하자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 김경주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피를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한 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어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삼십년 동안 침을 흘렸단다 그 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자국 소리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려요
자기 이빨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엄마 ……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김경주

 

 

  오늘 밤은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잠든 말들을 깨워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무시무시한 바람과 산맥이 있는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말의 잔등을 쓸어주며
  시간의 체위(體位)를 바라본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
  수돗가에 고개를 박은 채
  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갈증은, 이미지 하나 육체로
  무시무시하게 넘어오는 거다

  말들이 거품을 뱉어내며 고원을 넘는다
  눈 속에 빨간 김이 피어오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말들의 고삐를 놓치면
  전속력으로 취해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설원 위에 나의 말을 눕힌다
  말들의 뱃살에 머리를 베고
  (우리는 몇 가지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둥둥둥 북을 울리듯 고동치는 말의 염통!
  말의 배 안에서 또 다른 개인들이 숨쉬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밤하늘, 동굴의 내벽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연령
  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말의 등에서 몇 개의 짐들을 떼어내준다

  말들이 다시 눈 덮인 고비 사막을 넘기 시작한다
  그중엔 터벅터벅 내가 아는 말들도 있고
  터벅터벅 내가 모르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 밤엔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음악 속으로 날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바퀴가 없는 비행기랄지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內感) 같은 거, 말이
  비틀거리고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분만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의식을 향해 말은 제 깊은 성기를 꺼낸다
  기미(機微)란 얼마나 육체의 슬픈 메아리던가

   그 사랑은 인간에게 갇힌 세계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렌덤하우스

육체에 갇힌 슬픈 메아리들을 설원과 사막에 풀어놓는 취한 말과 바람의 연령을 해독하는 시인의 영혼이 연인처럼 싸우며 광활한 음악으로 어우러진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수돗가에 고개를 박은 채/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內感)을 다이나믹하게 묘파한 동사(動詞)로서의 시, 혹은 21세기적 생명파 시.

박형준 시인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메모 : 다시읽고 싶어서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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