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스무 살로 내리다
이렇게 춥고 눈이 쌓이는 날엔
신부야 가난한 우리가 더 깊은 산골로 가서
산골로 가서 눈에 묻혀
한 스무 살쯤으로 살면 좋겠다
지하수 펌프가 얼어서
내가 장작을 패고 있는 사이
계곡물을 길러 가는 신부야
네 귀가 추위에 빨갛게 얼었구나
나는 패던 장작을 내려놓고
털 부숭한 산토끼나 한 마리 잡아서 그놈의 가죽으로
신부 귀를 감쌀 귀덮개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가만가만 토끼 발자국을 찾아 나서겠지
토끼 발자국을 따라가면
눈 속에 먹을 것을 찾아
아, 거기 눈처럼 하얀 토끼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애처로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
그놈의 귀가 내 사랑하는 신부의 귀처럼 빨갛구나
나는 토끼와 토끼의 신부와 그 어린 자식들이 안쓰러이 떠올라서
마른풀이라도 뜯어 먹으렴 하면서
언덕에 쌓인 눈을 파헤쳐주곤 모른 척
돌아서 내려오겠지
자꾸만 내 신부의 빨간 두 귓불이 생각나서
나는 내 겨드랑이 아래 두 손을 묻고
아직은 더운 체온으로 내 손을 데워서
가만 물 긷고 있는 신부의 두 귀를 감싸주겠지
그러면 내 손을 타고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먼 우레 소리처럼 건너갈까
네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피의 온도가
내 손을 타고 건너오겠지
소주병이 비어갈수록
눈은 스무 살 적 그 빛깔로 내리고
내려 쌓이고 오늘은
군불을 조금만 넣어도 밤이 더울 것만 같고
복효근 시집 『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2013)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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