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 안상학
한 구덩이
세 포기 호박이 길을 간다
서로 싸우지 않고 뿔뿔이
삼각형 꼭짓점을 향해 가듯, 정확하게
한 포기는 언덕을 오르고
한 포기는 두둑을 기어가고
한 포기는 한사코 고추밭으로 약진한다
자연스럽다만 어쩌랴
고추밭 넝쿨을 언덕 넝쿨 옆에 슬쩍 끼워 넣는다
이내 우왕좌왕하는 두 줄기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건
장정 한 키 참나무 가지를 잘라 누이고
넝쿨을 얹어준다는 것
참나무가 손이 되어
새로 생기는 호박 손 하나하나 부여잡고
길을 일러준다는 것
길이란 이런 것이다
길이란 이런 것이다
이내 푸르고 너르게 길을 찾는 호박 넝쿨
누가 누구에게 손을 준다는 건
누가 누구의 손을 잡는다는 건
저렇게 은밀해야 한다는 듯
꼭 잡은 손 가린 잎들의 시치미가 넉넉하다
- 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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