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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안상학

향기로운 재스민 2015. 3. 25. 07:50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 안상학

 

 

한 구덩이

세 포기 호박이 길을 간다

서로 싸우지 않고 뿔뿔이

삼각형 꼭짓점을 향해 가듯, 정확하게

한 포기는 언덕을 오르고

한 포기는 두둑을 기어가고

한 포기는 한사코 고추밭으로 약진한다

자연스럽다만 어쩌랴

고추밭 넝쿨을 언덕 넝쿨 옆에 슬쩍 끼워 넣는다

이내 우왕좌왕하는 두 줄기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건

장정 한 키 참나무 가지를 잘라 누이고

넝쿨을 얹어준다는 것

참나무가 손이 되어

새로 생기는 호박 손 하나하나 부여잡고

길을 일러준다는 것

 

길이란 이런 것이다

길이란 이런 것이다

이내 푸르고 너르게 길을 찾는 호박 넝쿨

누가 누구에게 손을 준다는 건

누가 누구의 손을 잡는다는 건

저렇게 은밀해야 한다는 듯

꼭 잡은 손 가린 잎들의 시치미가 넉넉하다

 

 

- 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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