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스크랩] 이재무 시모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5. 3. 26. 07:01
 

 

 

 

                       이 재무 (1958 - )

    

 

       감자꽃.갈퀴.꽃그늘.                 

     낮잠. 내 몸 속에는.너의 부재 이후2.

     닥터 지바고.

     물수제비

     벌초. 보리.부드러운 복수. 부부. 빈자리가 가렵다.                  

     상처.석모도의 저녁. 설야. 쓴다                                     

     이별

     잘못된 진화. 제부도. 전문가.                 

     통나무

     해산

 

 

         감자꽃

       차라리 피지나 말 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를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 내 길고 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 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갈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 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올리는 것이다

      눈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자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 

 

                  <저녁 6시>. 창비.

  

 

 

  꽃그늘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그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낮잠

꽃 피운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 펼쳐놓는다

아니, 시는 건성으로 읽고

행간과 행간 사이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햇살은 낱알로 내려 뜰 가득 고봉으로

소복 쌓이고 시집 속 봄볕에

나른해진 글자들

겯고 튼 몸 뒤틀다가 하나, 둘, 셋

느슨하게 깍지를 풀고

꼬물꼬물, 자음과 모음 벌레 되어 기어나온다

줄기와 가지 따라 오르고

꽃 치마 속 파고들기도 한다

간지러운 듯 나무가 웃고

꽃은 벙글벙글

이마에 책 쓰고 누워

배 맛처럼 달고 옅은 꽃잠을 잔다

 

 

 

 

  내 몸 속에는

두 마리 서로 다른

짐승과 동물이 산다

그러나 이들이 사이좋게

이웃하며 산 적은 없다

순종이 안에서 한가롭게 어슬렁대면

야만은 밖에서 갈 데 없이 배회를 하고

광기가 저 홀로 미쳐 날뛰면

복종은 천애 고아가 되어 눈치만 본다

개와 늑대

이 오랜 유전의 숙명을 어쩔 수 없다

사랑의 손길에 길들여진

순한 귀와 탐스런 꼬리

분노의 발길질에도 순응을 모르는

성난 이빨과 이글거리는 눈

내 낡은 집 속에는

도무지 양보를 모른 채 으르렁대는

두 마리 서로 다른

인내와 충동이 산다

 

          

 

 

  너의 부재 이후2

너의 부재 이후 마당 한가운데

입 큰 구멍이 생겨버렸다

담장 너머로는 가녀린 풀잎들

무릎 꺾어 바람이 지나간 자리 가리키고 있다

생존이란 저처럼 치열한 것이다

꺽여지고 부러지고 잘려나가면서도

끝끝내 뿌리 놓지 않는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세월의 물살은

흙과 먼지, 재와 건초 습기 등속 불러와

둘레가 큰 구멍 지울 것이다

그러니 다만 침묵할 것 비명은

때로 얼마나 역겹고 추한 것인가

몸 낮추고 압핀 앞세워 오는

바람이 통과해가길 바랄 뿐이다

구멍 속으로 달빛 들어와 출렁거린다

그때마다 온몸에 한기가 든다

감기가 오려나보다

 

  

 

  닥터 지바고

군중 속에서

낯선 듯 낯익은 한 여자를 보았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그늘

마당 가득 검푸르게 출렁거리던

그해 여름의 하오

먼지 뽀얗게 내려 쌓인 평상에 앉아

손가락 낙서로 내게 은근한 마음 전하며

수줍게 웃던, 살짝 덧니가 엿보이던

웃지 않아도 볼우물 패던 여자

호수처럼 깊은 눈 속에 젖은 돌로 가라앉아

가슴 먹먹하던 그날의 여자를 떠나

처방 듣지 않는 봄을 시름시름 앓고 나니

소년은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다 저녁 여름비 내리고

아욱국 내음 번지는 인환의 거리

등 가려울 듯 등 가려울 듯

그러나 끝내 돌아보지 않고

한손엔 손때 얼룩덜룩한 가방

 또 한 손으로는 꽃 진 자리

얼굴 내민 햇복숭아 같이 앙증맞은 아이 손잡고

총, 총 , 총 시나브로 멀어져 가는 어제의 사랑

까치발로 서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내 추억의 뜰

선혈처럼 채송화 꽃잎 뚝 뚝 뚝 지고 있었다

 

 

 

 

 

 

                                                    

 

 

  물수제비

가속의 바퀴에 튕긴 돌처럼 도시를 빠져나와

인적 드문 호수 찾아온 사내

건너편. 한 때 삶의 표사잉었던 소나무숲

뚤어지게 바라보다 웃통 벗어부치고

수면에 수평으로 눈 맞춘 뒤 물수제비 뜬다

손아귀 빠져나간 돌 아슬아슬, 반짝이는 금빛 수면에

배 대었다 떼면서 날렵하게 날아간다

던질수록 늘어나는 물수제비의 동심원

낡은 치마처럼 잔주름 세웠다 지우곤 하는

저녁의 호수는 경기 들린 아이처럼 깜짝 놀랐다가

덤덤하게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간다

가지와 가지 사이 오가며 수다떠는 새와

호수 쪽으로 파란 손 뻗어오던 풀잎도 마찬가지

수평에 배 대었다 떼며 비상하는 돌의

그 아슬아슬한 긴장에 전율하던 때 그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수평을 걷던 돌 이내 물속으로 가라앉듯

삶은 순간 지워지고 만다. 흔적이란 그런 것이다

노을이 떠메고 간 자리 졸졸졸 어둠이 고여

물수제비 사리지고 풍덩, 돌 빠지는 소리 산을 울린다

 

<저녁 6시> 창비.

  

 

 

 

 

  벌초

무딘 날 조선낫 들고

엄미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보리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 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드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부드러운 복수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혹, 나의 시는 내 가난한 삶에 대하여

너무 지독한 복수를 꿈꾸어 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내 생을 지나치게 분식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내 삶을 지나치게 연민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떠난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해 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한 시대 불같이 뜨거운 이념에

높고 푸른 이상에 창백한 미래에, 어쩌다

바람에 불려 가로수 가지에 매달리게 된 검은 봉지처럼

위태위태 휘둘러 왔는지 모른다

생의 바닥에 낡은 그물 고집스럽게 던져 오면서

우연히 행운의 대어가 걸려들기를 바라왔는지 모른다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네

나는 목청높여 과장되게 고함치고 울어 왔는지 모른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가 낳은

부실한 시편들 중 몇몇은 남아 죽은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부부

안방 침실에서 네 명의 남녀가 잔다

등 돌려 벽 보고 자는 부부

모텔에서 만난 사내 떠올려 몰래 얼굴 붉히는 아내와

개구리 피부처럼 매끄러운 계집 맨살

짜릿짜릿 감촉 삼삼해 파자마 속 불끈 솟는 아랫도리

지그시 누르며 딴청 피우는 남편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들 부부에게

애정 싸움은 추억이 된 지 오래다

지루한 장마철 버팀목으로나 가까스로 견디는

쩍쩍 금이 가고 한쪽으로 형편없이 기울기 시작한 축대

보기에는 아슬아슬해도 여간해서는 붕괴되지 않듯

이 부부가 지키는 울타리 또한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속고 속이는 일도 오래되면 잠옷처럼 익숙해져 편안한 것인가

아이들은 제멋대로 알아서 잘 크고 있고

집안 대소사며 직장일 맡겨진 의무에 성실

근면한 중년 내외 줄다리식 사랑은

신혼 때와 달리 서로 힘쓰지 않음으로써 평형이 가능해진다

새근새근 사이좋게 들수날숨 서로 들이마시며

금슬 좋은 부부 긴 잠을 잔다

 

 

 

 

 

  빈 자리가 가렵다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 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 변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일 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 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상처

참, 나무가 앓고 있다

신음도 없이 표정도 없이

참나무의 허리

그의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진물이 먹여 살리던 식구들을 기억한다

가장의 진액은 그러므로 울음이 아니다

식량이다

 

나무도 상처가 아물 때

가려움을 느낄까

가려워서 마구 잎을 피우고

가지 흔들어댈까

 

상처 없이 미끈한 나무가 떨군 열매 믿을 수 없다

 

가려워서 어디든 몸을 문대고 비비고 싶은

생의 상처여,

낫지 말아라

몸 속의 너를 보낼 수 없다

상처는 기억이고 반성이고 부활이다   

 

 

 

 

  석모도의 저녁

비오는 날의 바다는

밴댕이회 한 접시, 도토리묵 한 사발을 내놓고

자꾸만 내게 술을 권했다

 

몸보다 마음이 얼큰해져서

보문사 법당에 오르며

생에 무늬를 남긴 인연들을 떠올렸다

 

비를 품고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저녁 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오는 날의 바다가 쓰는

생의 주름진 문장들을 읽는 동안

마음의 자루가 터져

담고 온 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얼마나 더 큰 죄를 낳아야

세상에 지고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섬에 와서도 내내 뭍을 울고 있는 내가 싫었다

자애로운 저녁은 어머니의 긴 치마가 되어

으스스 추워오는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설야

눈 내리는 겨울 밤

담배 한 대 피우고

동치미 한 그릇 뚝딱 비우고

까칠까칠한 얼굴 마른 손으로 거푸 쓸어내리고

창문 열었다 닫고

들숨 날숨 길게 마셨다 내뿜고

갱지 한 장 꺼내

생을 반죽했던 물컹물컹한 말들 써본다

 

봉해 놓은 묵은 서랍을 연다

몽당연필, 부러진 양초, 향나무 한 토막, 소인 찍힌 편지 봉투,

미완성 초고 시편, 쓰다만 연애편지, 고장 난 손목 시계, 촉 없는 만년필,

녹슨 못, 세금 고지서, 고인 된 선배와 함께 시골 간이역 배경 삼아 찍은 흑백 사진,

마른 꽃가루 등속

요술 상자인 양 어제가 불쑥불쑥 맨얼굴 내밀어 온다

 

험한 잠 자는지 아내의 잠꼬대 소리 요란하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 녀석

덮어 준 이불 걷어차며 잠이 달기만 한데

자정 너머의 시간 새하얗게 덮으며

분분분 눈은 내리고

내려서는 층층층 쌓이는데

마음의 국경지대 배회하며

오래 굶주린 적막이라는 짐승,

부욱북 광목 찢듯 하늘 찢는 울음소리 요란하다

 

 

 

 

   쓴다

식전에 일어나 마당을 쓴다

찬물 뿌려 아직 잠 묻어 있는 바닥 깨운 뒤

손주 볼 알뜰히 문질러 닦는 할미의 손길로

살뜰하게 구석구석 마당 쓸다보면

아직 보내지 못한 애증과 집착

왜 이리도 많은 것인가

돌에 스민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들

마당은 패고 싸리비 끝이 울며 부러진다

싸리비 다녀간 뽀얀 얼굴의 마당에

갓 태어난 햇살과 순진한 참새들 내려와 앉는다

손 씻고 방에 앉아 새삼 생각하노니

한 칸 한 칸 시간의 공백 채워가는 일처럼

두렵고 또 경건한 일이 있을까

안절부절 생각을 풀어놓다가 방문 여니

울타리 밖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감나무 그늘 그새 백지 마당 한 획 한 획

다는 채우지 않고 넉넉히 적시고 있다

 

 

        

 

  이별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 풀로 자랐습니다

 

 

 

 

 

  잘못된 진화

자연산 열매들이 수상하다

날로 껍질 두껍고 질겨져 간다

내색 없이 독 품은 것들도 있다

바깥에의 공포와 경계가 만든

불온한 진화

날지 못해 굴종의 표상이 된 새들처럼

훗날 본분 잃은 열매들

부정의 기표로 남으로

양파같이 깎아도,

깎아도 껍질뿐인 환란의 날

오리라

 

 

 

 

 

  제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전문가

밥 짓기 위해 쌀 푸러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 있는 자루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달에 한 번 비우는 자루처럼

삶과 죽은은 심상한 것

내게서도 시간의 낱알 한 알 두 알

시나브로 새어나가 어느새

몰라보게 생의 자루 홀쭉해졌다

어제는 낱알들 한꺼번에 쏟아놓은 밑 터진 자루

탁탁 털어 반듯하게 개어서는

마음의 창고 안에 고이 모셔놓았다

날마다 빈 자루들 늘어가지만

신이 정해놓은 길 바꿀 수 있는

삶의 전문가는 없다

낱알 하나가 또 소리없이 자루를 빠져나간다

 

     

 

 

 

  통나무

뿌리 없으니 고통 없고

슬픔 없고 즐거움 없는

톱 오면 잘리고

도끼 오면 찍히고

못 오면 박히다가

불 오면 태워져

흔적없이 사라지는 생

 

한때는 사철 싱싱한 생나무의

쭉쭉 자라는 줄기와 가지로

마구 하늘을 찌르던 그들

 

오늘도 지하철은 칸칸마다

빽빽히 통나무를 싣고 달린다

 

 

 

  解産

늦은 밤 산속 임자 없는 밤나무들

다 익어 영근 밤알 내기하듯 연달아 토해놓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도토리나무도

덩달아 바빠져서 바람을 핑계로

몸 흔들어댄다 아람 벌어져 떨어지는

열매들 이마 때릴 때마다 끙, 하고

산은 돌아눕는다 설핏 잠에서 깬 다람쥐

두리번거리다 곧 귀를 열어젖혀

토독토독 열매를 세다 다시 잠든다

저 멀리 인간의 마을은 불 꺼진 지 오래

신혼방 엿보고 오는 길인지

얼굴 불콰한 달빛

숨가쁜 소리로 환한 숲속

나무들 몰래 일어나 바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일 多産 마친 나무들 눈빛 더욱 맑고

몰라보게 몸을 수척해 있으리라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한남대 국문과를 졸업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석사과정)를 수료

1983년 무크지 ‘삶의문학’과 계간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집,「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별초」「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천년의시작) 

산문집,「생의 변방에서」

「신경림 문학앨범(공저)」「대표시 대표 평론(편저)」

제2회 난고 문학상을 수상

제1회 윤동주 문학상 수상

동국대대학원 · 한신대 · 추계예술대 · 청주과학대 · 한남대에서 시창작 강의

계간 ‘시작’ 편집주간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시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 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깊은 눈

 

마을 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멀어진 적막과 폐허를 본다

젊어 한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빝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잔치집에, 떡방앗간에, 예식장에, 초상집에

공판장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은 만취한 주인 실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 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가 오늘은

바람이 저를 다녀갈 때마다

저렇듯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의 기관들 거듭 갈아 끼우며

겨우 오늘에까지 연명해온 목숨 아닌가

올 봄 마지막으로 그가 갈아 만든 논에

실하게 뿌리내린 벼이삭들 달디 단 가을 볕

쪽쪽 빨아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 출렁, 그네 타는데


때 늦게 찾아온 불안한 안식에 좌불안석인 그를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제1회 윤동주상 수상작 중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밤 열차
빈 가슴에 흙 바람을 불어넣고
종착역 목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西山 삭적개비 끝에서
그믐달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주먹의 불빛조차 잠이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때묻은 동전이 울고 있었고
발끝에 돌팍이 울고 있었다
온다던 사람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고
내 마음의 산 비탈에 핀
머루는 퉁퉁 젖이 불고 있었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
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
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
페이지를 덮고
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
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
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
살(肉)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
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
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
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웃들이여,
누구나 저마다의 간절한 사연 없이
함부로 죄를 살았겠는가
머리에 이슬 내리도록 노니다가
발부리에 걸리는
돌 하나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장다리꽃과 나비

 

텃밭 장다리꽃 피어
나비 눈부시네
이 집 살림은 어떤가?
저 집 곳간이 났나?
이 꽃 저 꽃 치마폭
한나절 내내 들춰보더니
살림살이 모두 고만고만해
더는 흥미 없는 듯
발 재게 놀리며
둑 너머로 사라지네.


패랭이꽃

 

 

바지에 풀물 들도록
자지러지며 달려드는 풀벌레 울음의 거미줄
걷어내며 걷는 들길
무언가 한사코 뒷덜미 잡아당겨서
뒤돌아보면, 거기 길섶
멍든 몸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낯익은 여자
내가 남긴 죄의 발자국
누가 볼세라 부지런히 지우고 있다

 
절벽

 

 

몸속으로 들어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위태롭게 하는
그대여 차라리 나를 밀어뜨려
그대 발등에 고인 한 방울 피이게 하든지
그대 이마 위 아슬아슬 붉게 핀
한 송이 꽃으로 세워놓으시든지

 

 

 

퍼붓는 눈발 바라다보면
괜시리 가슴 두근거리고 손끝 저릿하다
마음으로 바다가 가득 차서 출렁거린다
퍼붓는 눈발 삼만리
너와 더불어 이 밤내
서둘러 가야할 곳 있는 양
몸 안에 짐승이 들어와서
발바닥 뜨거워지고 팔뚝에 피 솟는다
눈발이여, 님은 어제의 냇물되어
저만큼 흘러갔는데
몸에 피는 꽃
이 더운 숨을 어이할거나

 

아파트 신축 공사장

 

베란다 너머 신축중인 공사장 바라다본다
지리한 공사도 얼마 후면 끝을 보게 될 것이다
봄이면 싹 내밀던 저곳 수천의 방들은 층층마다
사각의 얼굴로 들어설 것이고 새로운 입주자들의 생활은
보람으로 분주해질 것이다 그곳에 별, 바람, 햇볕, 구름,
비, 눈, 신문과 광고지와 인터넷과 삐삐와 드라마와 비디오
등속이 다녀갈 것이고 크고 작은 인연들이 다녀갈 것이다
농작지였던 저곳 아파트가 들어서면 시작은 새롭되
끝은 지리멸렬한 삶이 낙서처럼 어지러울 것이다
방은 그렇게 추하게 늙어가면서 무수한 흔적들
그 무슨 훈장처럼 주렁주렁 온몸에 달고 있을 것이다
 
덧나는 슬픔

 

 

당신이 나를 떠난 슬픔보다
당신이 내게 남긴 사랑이며 정성
내가 당신께 던진 아픔이며 절망
잊는 일이 더 어렵고 괴롭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난 슬픔이야
세월의 물결이 와서 다스려주겠지만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아픈 삶의 교훈은
세월의 물결에도 자지 않고
자꾸 덧나는 고통이지요.


대천어항에서

 

우리의 노동보다도

우리의 기다림보다도

언제나 먼저 지치는 것은

사람의 그리움이다.


겨울나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 나무


비가 되어

 

내리는 저 비 따라
나무의 가지와 줄기, 뿌리 속으로
스며들어 그의 살[肉]이 되었으면
내리는 저 비와 더불어
지는 꽃잎 데리고 땅속으로 입적하였으면
내리는 저 비 꼬드겨
반공 떠도는 매연 끌어안고 투신하였으면
아,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의 말뚝에 매인
육신의 고삐 끊고
천상천하 혈연도 없이 주유하였으면
저 내리는 비 내가 되어


남겨진 가을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긴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발을 씻으며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발가락 사이 하루치의 모욕과 수치가
둥둥 물 위에 떠오른다
마음이 끄는 대로 움직여왔던 발이
마음 꾸짖는 것을 듣는다
정작 가야 할 곳 가지 못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 기웃거린
하루의 소모를 발은 불평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난날 나는 지나치게 발을 혹사시켰다
집착이란 참으로 형벌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텅 빈 구멍 탓으로
발의 수고에는 등한했던 것이다
나의 모든 비리를 기억하고 있는 발은 이제
마음을 버리고 싶은가보다
걸핏하면 넘어져 마음 상하게 한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으며
부은 발등의 불만 안쓰럽게 쓰다듬는다


저수지

 

갇혀 사는 동안 그의 몸은 늙고 지쳤다
수목의 품안에서 몸을 키워
골짜기 뛰쳐나오던 날의 광휘를
그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사육되는 물고기들이 그의 몸
거칠게 다루어도 노여울 수가 없다
가뭄에 노래진 풀이 눈에 선해도
그는 손 뻗어 적실 수 없다
어쩌다 수문이 열려 자유의 몸이 되어도
그는, 이제 진창의 하수도 외엔
갈 곳이 없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늦도록 내 눈을 다녀간 시집들 꺼내놓고 다시 읽는다
한때 내 온몸의 가지에 붉은 꽃 피우던 문장들
책 속 빠져나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울음은
그저 울음일 뿐 더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못한다
마음에 때 낀 탓이리라 돌아보면 걸어온 길
그 언제 하루라도 평안한 날 있었던가
막막하고 팍팍한 세월 돌주먹으로 벽을 치며
시대를 울던, 그 광기의 연대는 꿈같이 가고
나 어느새 적막의 마흔을 살고 있다
적을 미워하는 동안 부드럽던 내 마음의 순은
잘라지고 뭉개지고 이제는 적보다도 내가 나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도 그 누구처럼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돌멩이를 쥘 수가 없다
과녁이 되어버린 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동안
뿌리 잃은 가지처럼 물기 없는 나날의 무료
내 몸은 사랑 앞에서조차 설렘보다는
섹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질 좋은 밥도
마음의 허기 끄지 못한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늦도록
잘못 살아온,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운다


마른 혀가 남기는 얼룩

 

한때 나는 냇물 꿈꾼 적이 있었다 냇물이 되어
마른 땅 적시는 꿈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달콤하고도 위대한 사랑인가 풋것들이 내 젖은 혀
만날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 켜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냇물이 되어 갈지자로 흐르다가 더러 바위 만나는 일도
나의 즐거운 표정 바꾸지 못했다 소용돌이 속
날쌔게 나는 몇 마리의 싱싱한 물고기
내 품안에 키운다는 것 그것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유의미하고 벅차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내 뜻대로 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 냇물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내 몸속은 구정물로 가득 차 있고 내 마른 혀는
곰팡이꽃 피어 세상의 백지 위에 지울 수 없는 얼룩 남기고 있다
 
지하 계단

 

계단 오르며 나는 아직 세상 버리지 않는다
이 정직한, 한결같은 보폭은 언젠가 내 몸을
지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계단처럼 단순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으랴
계단 오르는 이들은 고개 들지 않는다
그것이 결코 발에 대한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목표는 언제나 우리를 조급하게 만든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희망은 또 한 번 뻔뻔한 얼굴로
검은 가래를 우리들의 수고 앞에 던질 것이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며 나는 세상을 믿는다
그것은 계단을 걷는 자의 의무이기도 하므로

 
마흔

 

몸에 난 상처조차 쉽게 아물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겪는 아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유혹은 많고 녹스는 몸 무겁구나


무덤에 누워

 

무덤에 누워 흐르는 강물 바라다본다
먼 곳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높낮이가 없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비늘만이 아득할 뿐
저기 어디쯤 내 초라한 생애도
애증의 물거품 튕기며 쫓기듯 어딘가로 흘러가리라

무덤에 누워 푸른 하늘 바라다본다
몇 마리의 구름이 강 건너 마을 쪽,
주인 잃은 소의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저기 어디즘 나의 후생(後生)도 누워
회환뿐인 이승에서의 질긴 인연 한가로이 되새김하리라

무덤에 누워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으로
나를 다녀간 아, 그리운 얼굴들.


시간의 그물

 

 

굴 속 웅크린 짐승으로 누워
봄 한철을 보냈다
냉장고 안에는 아내가 퇴근 때마다 사온
푸성귀가 가득했으므로 배가 고프진 않았다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읽기에도
나는 힘에 부쳤다
나라의 기둥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날아가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내 몸이 시들수록, 아내의 눈은 생기로 빛났고
나는 이상하게 먼 곳의 친구조차 그립지 않았다
시간의 그물에 갇혀 나는 행복했다

 
물속의 돌
                   

 

동글동글한 돌 하나 꺼내 들여다본다
물속에서는 단색이더니 햇빛에 비추어보니
여러 빛 온몸에 두르고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동글납작한 것이 두루두루 원만한 인상이다
젊은 날 나는 이웃의 선의,
반짝이는 것들을 믿지 않았으며
모난 상(相)에 정이 더 가서 애착을 부리곤 했다
처음부터 둥근 상(像)이 어디 흔턴가
각진 성정 다스려오는 동안
그가 울었을 어둠 속 눈물 헤아려본다
돌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물의 깊이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이 그를 다녀갔을 것인가
단단한 돌은 물이 만든 것이다
돌을 만나 물이 소리를 내고
물을 만나 돌은 제 설움을 크게 울었을 것이다
단호하나 구족한 돌 물속에 도로 내려놓으며
신발 끈 고쳐 맨다

 

문예중앙, 2004년 가을호 발표
2005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과수원

 
붉고 실한 열매 꿈꾼 적이 있다
스스로의 무게 못 이겨 떨어지는,
가을의 낙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성급한 주인은
열매의 열망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 익기도 전에 가지를 떠나는
저 불그스레한 얼굴의 열매들
그들이 그렇게 떠나고 가지들은 갑자기
늙어간다 젊고 싱싱한 늦가을 햇살
과원의 슬레이트 지붕이나 달구고 있다


벼랑


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년만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가는 몰인정한 사랑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은 그를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제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하루에 두 번 바다가 가슴을 열고 닫는 곳
      제부도에는 사랑의 오작교가 있다네

 

신발을 잃다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는데 신발이 없다
눈 까뒤집고 찾아도 도망간 신발 돌아오지 않았다
돈 들여 장만한 새 신 아직도 길도 들이지 않았는데
감쪽같이 모습 감춘 것이다 타는 장작불처럼
혈색 좋은 주인 넉살 좋게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누군가 버리고 간 다 해진 것 대충 걸쳐
문밖 나가서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그러잖아도 흥분으로 얼얼해진 뺨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구멍난 양심에 있는 악담 없는 저주 퍼부어대도
맺혀던 분 쉬이 풀리지 않는데
어느만큼 걷다보니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서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방통하지가 않다
그래 생각을 고치자
본래부터 내 것 어디 있으며 네 것이라고 영원할까
잠시 빌려쓰다가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
우리네 짧은 설운 일생인 것을
새 신 신고 갔으니 구린 것 밟지 말고
새 마음으로 새 길 걸어 정직하게 이력 쌓기 바란다
나는 갑자기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언약을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새 눈
인주 삼아 도장 꾹꾹 내려찍으며
영하의 날씨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걸어 집으로 간다


라면을 끓이다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 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여름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 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제19회 「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항아리 속 된장처럼

 

 세월 뜸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
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햇장이니 갑갑증이 일겠지 펄펄 끓는 성질에
독이라도 깨고 싶겠지
그럴수록 된장으로 들어앉아서
진득허니 기다리자는 거야
원치 않는 불순물도 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肉)로 품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
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
식탁에 오르자는 것이야

============================================

 1958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한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석사과정)를 수료했다. 1983년 무크지 ‘삶의문학’과 계간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에「섣달 그믐」「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별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최근에 나온 시집 - 푸른 고집 (천년의시작) 등, 산문집으로「생의 변방에서」, 그 밖의 저서에「신경림 문학앨범(공저)」「대표시 대표 평론(편저)」등이 있다. 제2회 난고문학상을 수상. 동국대대학원 · 한신대 · 추계예술대 · 청주과학대 · 한남대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으며, 계간 ‘시작’ 편집주간

 

팽나무가 쓰러, 지셨다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장수가 다녀가셨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냉장고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설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끊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네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 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 댄다

개펄

사내는 거친 숨 토해 놓고 바자춤 올리고
헛기침 두어 번 뱉어 내놓고는 성큼,
큰 걸음으로 저녁을 빠져나간다
팥죽 같은 식은땀 쏟아 내고는 풀어진
치맛말기 걷어 올리며 까닭 없이
천지신령께 죄스러워서 울먹거리는,
불임의 여자. 퍼런 욕정의 사내는
이른 새벽 다시 그녀를 찾을 것이다
냉병과 관절염과 디스크와 유방암을
앓고 있는 여자. 그을음 낀 그녀의 울음소리
이내가 되어 낮고 무겁게 마을을 덮는다
한때 그 누구보다 몸이 달고 뜨거웠던
우리들 모두의 여자였던 여자
생산으로 분주했던 물기 촉촉한 날들은
가고 메마른 몸속에 온갖 질병이나 키우며
서럽게 늙어가는, 폐경기 여자.
그녀는 이제 다 늦은 저녁이나 이른 새벽
지치지도 않고 찾아와 몸을 탐하는
사내가 노엽고 무서워진다
그 여자가 내민 밥상에서는 싱싱한
비린내 대신 석유내가 진동을 한다

테니스 치는 여자

테니스 치는 여자는 물 속 유영하는 물고기 같다
그녀의 동작은 단순하지만 매우 율동적이다
물오른 그녀의 종아리는 자작나무의 허리처럼 매끄럽다
땀 밴 등허리에 낙지발처럼 와서 안기는 햇발
통통, 바람 많이 든 공처럼 그녀의 종아리가 튀어 오르면
수음하는 소년처럼 나는 숨이 가쁘다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가 라켓을 휘두를 때 깜짝깜짝 놀라며 파랗게 몸을 뒤집는
이파리들, 내 마음의 사기그릇들 반짝반짝 웃는다
네트를 넘어오는 발 빠른 공에 시선을 집중하는
그녀의 눈 속으로 오후의 낡고 오래된 시간들이 갑자기
생기를 띠고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날마다 오후 세 시 공원에 나와 하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테니스를 치는 여자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의 뜰에 그리움의 풀씨 내려와 싹을 틔운다
알맞게 달구어진 그녀의 팔뚝이 지나간 허공에
몰려드는 파란 공기 입자들 그녀가 테니스를 치는 동안
세상은 발칙한 소녀와 같이 건방지고 젊어진다 그녀가 간간이
터뜨리는 웃음으로 세상은 환하고 눈부신 꽃밭이 된다
테니스 치는 여자는 공중을 나는 새처럼 가볍다
저 가벼움이야말로 무거운 세상을 이기는 힘이 아닐까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풍경이 되어 풍경 속을 거닌다

저수지

그녀 스스로 속 내보인 적은 없다
아무도 그녀가 크게 웃거나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잔주름 많고 검푸른 눈엔
그렁그렁 수심이 고여 있다
수심 깊어서 한낮엔 앞산 뒷산을 담고
밤에는 천상의 것들 넉넉히 품는다
어느 해인가 빚에 쫓겨 도망 다니던.
성실했으나 불운했던 사내 끌어들여
서방으로 삼았다는. 구설 끊이지 않는
무서운 여자. 비밀 많은 그녀가 딱 한 번
궁금한 속 내비친 적이 있다
지독한 가뭄이 있던 그 해 그 여름
화냥년 되어 가랑이 쩍 벌리고 누워
소문 듣고 온 남정네들 설레게 했다
그녀 진흙 같은 자궁 속에는 팔뚝만 한
잉어며 붕어들이 나뒹굴고 꿈틀대며
쩍쩍 입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수심 깊은 여자
위기의 사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 여자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메모 :

'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진첩 중에서/쉼보르스키  (0) 2015.04.01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이재무  (0) 2015.03.31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안상학  (0) 2015.03.25
틈/김필영  (0) 2015.03.24
콩나물에 대한 예의/복효근  (0) 201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