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
쉼보르스키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가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사진첩」중에서
* 이규보의 말 시마詩魔를 읽다가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에 올라보았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놓을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능히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엔 귀뚜라미처럼 읊조려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 양 노래부르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론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와서는,/ 한번 붙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지./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다 빠져 살에는 남아 있질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우스웁구나./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부비며 홀로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본다./ 살고 죽는 것이 필시 시 때문일터이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렵도다.
2015.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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