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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훈/박용래

향기로운 재스민 2015. 5. 27. 07:45

월훈月暈

박용래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 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서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박용래

* 월훈月暈 : 달무리

* 허방다리 : 함정으로 판 구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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